[문학예술]거울 속의 천사

  • 입력 2001년 4월 27일 19시 16분


◇거울 속의 천사/김춘수 시집/120쪽, 5500원/민음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일랑 잊어버리자. 반세기가 넘는 그의 시업에 무턱대고 고개부터 조아리지도 말자. ‘원초적 동일성이 회복된 불립문자의 세계’라는 알쏭달쏭한 해설에 주눅들 필요도 없다.

다만, 여든이 넘은 시인이 두해 전 봄바람에 실려간 반쪽을 그리는 ‘망처가(望妻歌)’의 애절함만은 천천히 음미해보자.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 어디로 갔나, /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 넙치지지미 맴싸한 냄새가 / 코를 맴싸하게 하는데 / 어디로 갔나, /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 되돌아 온다’(‘강우(降雨)’중)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동시에 저승의 아내에게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몇 해 전 많은 이를 울렸던 ‘접시꽃 당신’보다 정제되어진, 슬프나 슬퍼하지 않는 쓸쓸함에 가슴 서늘해짐을 느낀다.

‘내 귀에 들린다. 아직은 / 오지 말라는 소리, / 언젠가 네가 새삼 / 내 눈에 부용꽃으로 피어날 때까지,/ 불도 끄고 쉰 다섯 해를 / 우리가 이승에서/ 살과 살로 익히고 또 익힌 / 그것’(‘대치동의 여름’중)

피안의 세계에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아내는 고령인 그가 늘 맑은 정신으로 시를 쓰게 만드는 힘이다.

“아내는 내 곁을 떠나자 천사가 됐다. 아내는 지금 나에게는 낯설고 신선하다. 아내는 지금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아내는 그런 천사다. 이 시집에 실린 88편의 시들 모두에 아내의 입김이 스며져 있다.”

그는 어릴 적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천사’라는 말을 처음 듣고 낯설었던 기억을 갖고 있고, 대학 시절 보았던 릴케 시집에서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천사에 매혹됐다고 한다.

이제 생의 황혼에서 세 번째 천사를 발견했다는 노 시인의 얼굴에 첫 사랑을 고백하는 소년의 상기된 얼굴이 겹쳐진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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