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대통령위한 증시대책

  • 입력 2001년 4월 8일 18시 40분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직전인 1997년 가을의 얘기다. 어떤 고지식한 분이 친구의 권유로 경기 성남시 분당에 대형 빌라를 청약했다. 거의 100평에 이르는 집에 그동안 애지중지 모아왔던 돈을 거의 다 털어넣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계약을 하자마자 외환위기가 터졌다. 같이 사자고 했던 친구는 앞으로 제값을 받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니 자신은 계약금을 포기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길(My Way)’을 고집했다. 계약금이 아까웠을 뿐만 아니라 설마 집값이 떨어지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에 계속 중도금을 부었다. 그 결과는 실패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집 가격은 아직도 분양가에 미달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황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다. ‘내 돈을 내가 쓰는데 무슨 소리냐’고 한다면 달리 할말이 없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이런 태도를 되풀이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발표된 ‘4·4증시대책’이 대표적 예다. 올 들어 두 번째 나온 이번 증시 부양책은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올해 6조원 규모로 늘리고 장기투자자에게 세금을 줄여주는 게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내용은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로 나왔던 대책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래서인지 정부대책이 나온 날 종합주가지수는 500선 밑으로 떨어졌다.

증시주변의 반응도 시큰둥했다. 한국증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증시가 워낙 불안한 탓도 있지만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정작 대책을 발표한 재정경제부도 먼산만 바라보는 모습이다. 어느 증시 관계자는 대통령이 “증시를 살리라”고 야단칠까봐 미리 대책을 서둘러 발표한 게 아니냐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연기금의 주식투자는 어디까지나 연기금 운영담당자가 책임지고 할 일이지 정부가 ‘늘려라 마라’ 말할 성격이 아니다.

정부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른바 국민주 정책을 썼다. 그때 주식을 산 사람치고 재미를 본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른바 개미군단이 죽을 고비를 맞고 있을 때 정부가 내놓은 처방은 기관투자가였다. 투자신탁회사에 돈을 대주면서 주식을 사도록 한 ‘12·12조치’로 인해 투자신탁회사는 부실화돼 오늘날까지 금융시장의 불안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고도 주가가 다시 하락하자 정부는 증시개방이란 처방을 내렸다. 지금 외국인들은 국내 전체 주식의 30%를 갖고서 한국 증시를 주무르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증시의 하락으로 증시에 돈이 말라버리자 정부는 연기금을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시키려 하고 있다. 앞으로 2, 3년간 약 25조원을 증시에 투자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한국증시의 시가총액을 대략 200조원으로 본다면 약 10% 이상을 연기금이 맡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민의 미래가 담긴 연기금을 주식시장으로 무리하게 몰아갈 수는 없다.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이치나 마찬가지다.

증권가에는 ‘대통령의 인기와 주가는 정비례한다’는 말이 떠돈다. 증권정책을 만드는 당국자들이 대통령의 인기를 너무 의식하지 않나 해서 걱정스럽다. 비단 증시대책만이 아니다. 대통령만 바라보지 말고 국민을 보고 만드는 정책이 아쉽다.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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