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고목탄

  • 입력 2001년 3월 30일 19시 01분


◇고목탄/나카가미 겐지 장편소설/366쪽, 8500원/문학동네

“나카가미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은 끝났다.”

일본의 대표적 문학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기꺼이 한국어판 서문을 써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소설은 중량감을 갖는다. 출간 25년만에 이 소설이 한국에 번역된다는 사실만으로 열띤 것일까? 고진은 여기서 40대 중반에 병으로 세상을 뜬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1946∼1992)의 문학세계에 대한 상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낯설기 그지 없는 이 소설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태평양을 면한 일본 와카야마현의 카레키나다(枯木灘) 해안. 세상과 단절된 듯한 작은 어촌에 막노동판 작업반장인 아키유키가 살고 있다. 그의 가족관계는 복잡해서 친모와 친부, 양부와 양모 사이에 10여명의 형제 자매가 얽히고 설켜 있다.

소설은 아키유키에게 옥죄어오는 뒤틀린 피의 골육상쟁을 불끈불끈 솟는 근육질의 문체로 묘사한다. 혈족간의 애증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비루한 인간의 심연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욕망의 진경(眞景)이다.

이야기는 책 앞에 실린 가계도를 수시로 곁눈질해야 흐름을 놓치지 않을 만큼 복잡하지만 주인공 아키유키를 둘러싼 이야기는 크게 둘로 요약된다. 하나는 방화 사기 갈취 살인 등 ‘골목’에 떠도는 온갖 악소문의 주인공인 생부 류조를 원망하면서 결국 닮아가는 인생유전(人生流轉)이며, 다른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더러운 피로 이어진 인연의 끈을 끊기위해 시작된 창녀인 이복 여동생과의 근친상간(近親相姦)이다.

하지만 두 가닥의 이야기는 결국 피비린내 나는 죽음으로 수렴된다. 아키유키가 이복동생과의 관계를 안 후 자신에게 덤벼든 또다른 남자 이복동생을 살해함으로써 ‘망나니’ 같은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는 운명의 업(業)을 잇는 것이다.

남성적인 힘이 가득한 이 소설은 일본에서 뿐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소프트한 도회적 일본소설에 길들여진 한국에서도 독특한 돋을새김을 이룬다. 고진을 비롯한 많은 일본 평론가들이 투박하고 토속적인 이 소설에 매혹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여기서 ‘코지키(古事記)’로 불리는 일본 신화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제 ‘枯木灘’(1977).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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