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윤득헌/얼굴은 가렸어도

  • 입력 2001년 3월 30일 18시 34분


검은 마스크를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은 아무래도 어두운 쪽이다. 테러리스트, 반군, 자객 등이 먼저 떠오르는 까닭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일 수 있겠다. 하지만 검은 마스크가 테러리스트의 상징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30년쯤 된다. 1972년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 이 뮌헨올림픽 개막 전날 선수촌을 습격해 이스라엘 선수단원을 사살한 사건으로부터 현대적 의미의 테러가 시작됐다고 하는데 그들이 바로 검은 마스크를 했었다.

▷ 마스크 착용이 괜찮아 보이는 경우도 물론 적지 않다. 멕시코의 반군단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을 이끄는 마르코스 부사령관도 그에 속할 것이다. 백인인 그는 1994년 원주민 권익신장을 위해 무장봉기해 정부군과 유혈충돌을 벌이다 정글로 들어간 이후 '얼굴 없는 사나이' 가 됐다. 그로부터 무장투쟁대신 인터넷 등을 이용한 여론투쟁에 주력해 온 그는 최근 원주민 보호법안의 처리 촉구를 위해 정글에서 멕시코시티까지 3000여km의 평화행진을 했고, 29일엔 반군지도자들의 의회연설을 관철시켰다.

▷ 마르코스가 멕시코에서 뿐 아니라 세계의 주목과 성원을 받는 이유는 마스크로 감춰진 그의 지적 이미지와 투쟁 방식 때문이다. 프랑스 유학도 한 그는 반군으로는 이색적 지식인이다. 인터뷰, 서신, 인터넷으로 세상에 그의 뜻을 전해온 그는 여러 권의 책도 냈다. 1996년에는 신자유주의 반대 대륙간 회담도 제의해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투쟁 거점에 많은 외국인을 초청해 EZLN 진압작전을 편 정부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 그의 정확한 나이 성장배경 학력도 마스크에 가려져 있다. 그래서 '전설적' 게릴라 지도자로 불리고 공산혁명가 체 게바라에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투쟁목표가 권력장악이 아니고 원주민의 빈곤환경을 타파하는 것일 뿐이라며 그런 말을 거부한다. 반군 최고지도자인 그가 부사령관을 고집하는 것은 사령관은 원주민이라는 생각 때문이고, 의회연설에 직접 나서지 않은 이유도 EZLN이 원주민단체라는 점을 강조할 요량이었다고 한다. 앞에 나서지않는 그의 지도 방식이 신선해 보인다.

<윤득헌 논설위원>dh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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