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박일호/'지역문화의 해' 구호만 있다

  • 입력 2001년 3월 28일 18시 29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한 미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폐허가 되어 버린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예술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예술 문화 분야에서도 새로운 활력이 나타냈다. 지금 우리가 뉴욕을 현대미술의 메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부터 연유된다.

▼시민들 스스로 키워야▼

그런데 미국이 전통과 연륜을 갖춘 유럽을 문화적으로 앞서게 되기까지는 이러한 요인 외에도 자체 노력이 덧붙여져 있었다. 미국이 '문화의 변방' 이라는 자각이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정부와 국민의 합심과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기업가들이 미술관을 짓기 시작했고, 학교에서는 첨단 예술경향에 대한 교육이 이뤄졌으며, 시민들도 미술관과 공연장을 찾는 생활패턴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스스로의 촌티(?)를 벗어버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부가 그 어떤 조건도 전제하지 않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화적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과 기반 구축이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올해는 정부에서 정한 '지역문화의 해' 이다.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 목표가 중앙과 지역간의 문화격차를 해소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건전해 보이지 않는다. 서열화의 틀로 문화를 재단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현대는 복합문화시대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경향들이 갖는 가치의 활성화에 초점이 맞추어져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방법으로 지역문화를 활성화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의 접근이 필요하다. 하나는 시민들의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의 역할이다. 우선 앞서 말한 '변방' 이라는 자각과 의식이 보다 철저해져야겠다는 것이다. 변방이라는 의식만 있지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지역문화가 중앙에 비해 수준이 낮다는 불평만 하지 지역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며 육성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으레 차가 막히는 야외로 나가고 또 다시 스트레스를 쌓아가는 생활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주변의 전시장과 공연장을 찾고 또 CD 한 장을 사들고서 흡족해 한다면 어떨까? 그것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결국 자신의 촌티(?)를 벗어나게 하는 작은 투자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정부의 입장은 어떤가? 문화관광부에서는 지역문화의 해 를 설정해 놓았지만, 올 한해의 4분의 1이 지나간 지금까지 그 어떤 구체적인 방안도 내놓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지방정부는 지방정부대로 고민에 빠져 있다. 그 생소한 '지역문화' 에 맞는 일을 찾는 것이 고민이고, 가시적인 효과를 찾아내는 것이 고민이다. 문화적 투자란 정신적 기간시설을 구축해내는 장기간에 걸친 사업이며, 문화란 위 아래의 관계이기보다는 수평적인 관계라는 생각을 그 어느 쪽도 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결국 올 한해가 끝날 때 쯤에는 지역문화가 있고 그에 반대되는 중앙문화가 있다는 생각만을 고착화시켜 놓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정부도 구체적 방안 안 내놔▼

지역감정이 망국의 병이라 외치면서 문화에서의 또 다른 지역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정부 당국자부터 작지만 구체적인 것의 실천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정치인이나 위정자들이 구색 갖추기로 보여주는 문화인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으로 문화를 사랑하고 생활화하는 문화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리고 정치면을 장식하는 폭탄선언이나 000리스트보다 문화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지원대책에 더 큰 관심이 쏠리게 하는 세상을 열어준다면 어떨까? 그런 상황이 올 때 21세기가 문화의 세기이고 문화경쟁시대라는 구호가 우리 가슴에 와 닿게 될 것이다.

차가 막히는 야외로 나가면서 한풀이하듯 즐기려는 우리네 생활패턴이 정치가 주는 허탈감과 사회비리에 대한 반발심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불과 250여년 역사의 미국이 50년의 기간을 거치면서 문화적 선진국임을 자부하게 된 것이 경제적인 풍요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아울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박일호(대전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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