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안드레아 게일’을 닮는가

  • 입력 2001년 3월 16일 18시 32분


우리 경제의 현실을 보면 ‘퍼펙트 스톰’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삶에 찌든 선원들이 악천후 때문에 모두들 기피하는 황금어장에 인생의 희망을 몽땅 걸고 나섰다가 폭풍에 휩쓸려 구구절절 사연들이 담긴 생을 마감한다는 비극적 내용의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씻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하나 가슴에 남는다. 사상 최대의 ‘완벽한 폭풍(퍼펙트 스톰)’이 저 앞에 기다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불과 한나절을 참지 못하고 귀항길을 서둘러야 했던 사연 때문이다. 모처럼의 만선에도 불구하고 불운의 어선 ‘안드레아 게일’호(號)의 냉동기는 고장났고, 그래서 선원들은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생선이 상하기 전에 그걸 돈으로 바꾸기 위해 폭풍과 일전을 벌이는 모험을 선택해야 했다.

▼'퍼펙트 스톰'앞의 반도체산업▼

선원들은 고장이 잦은 냉동기를 고쳐 달라고 수도 없이 졸랐지만 그 때마다 선주는 그 ‘하찮은’ 냉동기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처럼 참혹할 줄은 선주건 선원이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혹 우리 주변에 ‘안드레아 게일의 냉동기’는 없을까. 가정이건 기업이건 정부 조직이건 구성원들의 사소한 요구가 이런 식으로 무시돼 훗날 낭패를 본 경우는 없던가. 목적 달성에만 매달려 앞으로만 치닫다가 하찮게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어떤 사안을 간과함으로써 파국을 맞는 일은 없었는가.

그런 눈으로 요즘 우리 경제 최대의 현안인 현대전자의 경우를 보자. 1999년초 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정부 주도의 이른바 빅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합병될 때부터 어쩌면 오늘날의 비극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LG반도체는 재무상태가 현대전자보다 월등하게 좋았고 전자와 전기를 주력으로 하는 LG그룹은 시스템상 시너지면에서 자동차와 건설을 주력으로 하는 현대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LG는 필사적으로 빅딜에 반대했다.

그러나 싸움은 현대가 LG반도체를 인수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당정(黨政)이 반도체빅딜을 거부하고 있는 LG반도체에 대해 채권 금융기관이 할 수 있는 모든 권한 행사를 하도록 금융감독기구에 지시’한 직후 LG가 승복키로 한 것이다. 군사정권에서 일어난 협박이라고 착각하지 마시라. 1998년12월29일자 언론의 보도 내용일 뿐이다.

그 때 정부는 빅딜을 완성하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재무상태가 열악한 현대가 인수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파국의 가능성은 무시했다. 현대전자가 합병으로 부채 13조원, 인수 금액 2조5000억원 등 모두 15조5000억원의 빚더미에 올라앉고도 제대로 굴러갈 것으로 전망했다면 그건 명백한 오산이다.

이처럼 ‘냉동기’고장을 무릅쓰고 출항한 ‘현대전자호(號)’의 오늘날 모습은 어떤가. 바로 그 부실한 재무구조 때문에 이 회사는 ‘퍼펙트 스톰’을 코앞에 두고 있다. 당시 재계가 그렇게도 ‘선주’에게 재고를 요청했지만 그걸 무시한 결과가 지금 어떤 모습인가. 영화에서 막상 재난이 닥친 이후 선주의 모습이 한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것처럼 빅딜을 광(狂)적으로 신봉했던 당시 정치권의 실세와 정부 책임자는 현대전자가 폭풍을 앞에 둔 상황에서 얼굴들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영화와 현대전자 사태가 다른 점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재난이 일으킬 파장의 크기다. 영화에서는 그까짓 배 한 척 빠져 봐야 선원 가족 몇몇의 불행으로 끝난다. 그러나 만에 하나 현대전자가 잘못될 경우 국내 금융계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IMF사태와는 견줄 수도 없을 만큼의 엄청난 충격이 국민 전체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현대전자가 꼭 살아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몰아치기 정책의 후유증들▼

이런 일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걱정은 더욱 커진다. 그림만 대충 그린 채 몰아치기 와중에서 국민의 목숨까지 희생됐던 의약분업이 그랬고, 낙찰을 확신한 나머지 2단계 준비를 하지 않았다가 국제적 망신만 당한 채 우리 사회의 심각한 고민거리로 전락한 대우자동차 문제도 그에 해당한다. 화해 무드에 들떠 서둘러 띄워진 금강산관광호도 지금 세계 최고의 입산료 때문에 폭풍속으로 항진하는 일엽편주 꼴이다.

폭풍이 저절로 소멸되든지 ‘냉동기’가 극적으로 고쳐지는 걸 기다리는 것이 해법의 전부라면, 유사한 일의 재발을 막는 예방적 노력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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