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매거진]르완다 병원의   나이팅게일

  • 입력 2001년 3월 16일 18시 13분


 김수진 간호사(맨 왼쪽)
 김수진 간호사(맨 왼쪽)
<아프리카 르완다! 그곳은 이제 어느 전원 풍경같이 포근함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12월에 가끔씩 내리는 이곳의 새벽비는 한국의 알싸한 봄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르완다에서는 우기 동안에 말라리아 환자가 많이 발생한다. 요즘도 병원에 입원하는 아이들의 80%가 말라리아와 그 합병증으로 인한 빈혈환자들이고 그 중 25%가 사망하는 실정이다.

특히 생후 5·6개월에서 2세까지의 아이들이 많이 죽는다. 대다수 아이들이 가난해 집에서 앓다가 죽어가기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서 약 한번 써보고 죽으면 그나마 다행이란다.>

나에게는 지금도 마음속의 돌덩이처럼 가슴을 저리게 하는 일이 있다. 이곳에 온지 스무날쯤 되던 날 아침,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비마저 내려 가방 속 깊숙히 넣어둔 두꺼운 셔츠를 꺼내 입었다.

'오늘은 어떤 아이가 죽을까?'라는 생각에 절로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총총걸음으로 간호사실로 갔다. 흰가운을 입으며 '하나님, 이 땅의 불쌍한 아이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생명을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야간 근무자로부터 환자들에 대한 진료기록지와 업무자료를 넘겨받고 어린이 병실로 향했다. 열다섯 병상이 빼곡한 병실에 들어서자 현지인 특유의 몸냄새와 아이들의 지린내가 이내 온몸을 휘어감고 콧속을 파고 들었다.

1회용품이 귀해서 기저귀를 바꾸지 못해 옷과 침대시트에 대·소변을 묻힌 채 그대로 깔고 덮고 자는 이곳 병실의 광경은 이제 더이상 낯설지가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 막혀 있던 햇살이 죄다 병실 안으로 쏟아지게 했다. 우는 아이, 자는 아이 한명 한명을 살피는데 유독 왜소한 여섯살배기 사내아이가 오늘은 크게 내 눈에 들어왔다.

'호흡곤란에다 저체온, 혼수상태까지 왔구나!' 아이의 엄마는 살려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내 손을 그 아이의 배쪽으로 끌어갔다.

아이의 배에서 북소리가 났다. 배에 가스가 찬 것이었다. 즉시 산소호흡기, 비위관 그리고 주사바늘을 살핀 후 불안한 마음으로 병실을 빠져 나왔지만 그 아이의 초점없는 눈동자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2시간 후, 아니나 다를까 아동병동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아이 엄마가 급하게 뛰어왔고 나는 병실로 갔다가 다시 간호사실로 가서 기도유지기(air-way)를 들고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 아이는 이미 호흡과 심장이 모두 멎어 있었다. 의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곧바로 간호과장이 내 뒤를 따라왔지만 그는 멀건히 쳐다볼 뿐이었다.

아마 이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입에 내 입을 갖다댔다.

인공호흡을 한지 몇 분이 지났을까. 얼굴엔 땀이 흐르고 머리는 몽롱해질대로 몽롱해져 정신이 없었지만 그 아이는 결국 마지막 들숨을 한번 마시고는 더 이상 호흡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부릅뜬 두 눈을 감겨주었다.

"얘야, 말라리아 없는 하늘로 가거라. 하나님 아버지, 가엾은 이 아이의 영혼을 받아주세요."

병실을 나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옆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간호과장이 괜찮냐고 뭐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데 자꾸만 화가 났다.

▼6살 소년의 죽음으로 생명을 구하게 된 어린 영혼들▼

다음 날 여전히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간호과장실로 갔다. 아침인사를 나누는데 새로운 소식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어제 회의에서 급하게 중환자실을 따로 설치하기로 결정했어요."

내가 그렇게 원하던 중환자·코마(COMA:혼수상태)실을 이제 만든다는 기쁜 소식이다. 진작 이런 시설을 만들었다면 어제 그 아이는 일반 병동이 아닌 중환자실에서 여러 장비의 도움으로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더욱이 병원장은 직접 찾아와 중환자실에 필요한 의료장비와 의약품 및 모든 재원을 신청하면 아낌없이 지원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아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장비가 한 아이의 죽음으로 마련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남아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다행이었다.

한국이웃사랑회를 통해 르완다 레메라 루꼬마 병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지도 벌써 다섯달 째 접어든다.

중환자병동에서 일반병동으로 가거나 퇴원하는 아이들의 환한 웃음을 볼 때 나는 가장 행복해진다.

이 곳에서 더이상 아이들의 죽음이 당연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김수진 간호사, 르완다 레메라 루꼬마 병원

(이 글은 한국이웃사랑회의 격월간지 '좋은 이웃' 58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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