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백과사전 24권을 핀 머리에 써넣는다

  • 입력 2001년 3월 5일 09시 52분


20세기에 인간은 1백만분의 1의 마이크로세계를 정복했다. 그리고 이제는 10억분의 1의 나노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마이크로세계와 나노세계는 단지 크기의 차이일까. 나노과학이 제시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얼마전 모방송의 퀴즈프로그램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왔다.

문제 : 산자부가 정보기술인 IT, 신에너지환경인 ET, 생물산업인 BT와 NT를 21세기 4대 신산업으로 육성하기로 했다. 여기서 NT란 어떤 산업을 말할까?

① 항공·우주기술 ② 신소재 극미세기술

③ 네트워크기술 ④ 원자력기술

이 문제를 보고서 참가자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정답은 ④번입니다”라고 답했다. 과연 맞았을까.

최근 매스컴이나, 신문지상에서 각광을 받으면서 자주 거론되는 분야를 꼽으라면 IT, BT, ET, 그리고 NT이다. 이때 NT는 NanoTechnology의 약자로 나노과학, 나노기술을 말한다. 어떤 분야이길래 이처럼 각광받는 것일까.

우선 ‘나노’의 의미를 알아보자. 나노는 10억분의 1을 나타내는 단위로, 난쟁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서 유래됐다. 따라서 1나노미터(nm)는 10-9m로, 머리카락의 굵기보다 약 8만배 작다. 또한 수소원자 10개를 나란히 늘어놓은 정도라고 한다. 만약 나노와 반대로 1m를 10억배하면 어떨까. 그 크기가 무려 태양의 지름과 비슷해진다. 태양의 지름은 1백39만2천km, 약 1.4×109m다.

도체와 반도체의 이중성 가진 탄소나노튜브

탄소나노튜브의 모습. 탄소나노튜브는 부도체이지만 여러개 꼬아주면 반도체의 성질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나노기술은 나노크기로 물질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의미할까. 거의 맞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구동되는 마이크로칩을 사용한 기기보다 더 작은 크기의 물질을 조작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히 기존보다 더 작게 만든다는 데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년을 이끌어온 마이크로기술은 고전역학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나노기술이 여는 세계는 양자역학이 지배한다. 따라서 나노물질은 이전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특징들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노물질은 어떤 새로운 특성을 가질까. 우선 탄소로 이뤄진 물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아마도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과 아름다운 빛과 강도를 자랑하는 다이아몬드가 쉽게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꿈의 물질로 일컬어지면서 각광받고 있는 탄소나노튜브도 탄소로 이뤄진 물질.

같은 탄소로 이뤄졌으면서도 탄소나노튜브를 이처럼 높이 평가하는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1991년 일본 NEC 연구개발팀의 리지마가 탄소나노튜브를 최초로 발견했다. 모양은 터널이나 관처럼 생겼고, 관의 지름은 1-50nm에 이른다. 그리고 도체다. 다이아몬드가 부도체인데 반해 흑연은 도체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탄소나노튜브를 여러개 꼬아주면 반도체 성질을 나타낸다. 도체가 모여 반도체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신기한 현상을 보이는 탄소나노튜브를 연결해 적절한 회로를 구성할 수 있다면 현재의 반도체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난 반도체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만약 이를 이용해 수nm 정도 크기의 기억소자나 회로를 만든다면 집적도를 현재 최첨단의 집적회로에 비해 1만배 정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또 탄소나노튜브는 속이 비어 있어서 가벼울 뿐더러 탄소원자 사이의 결합력이 실리콘에 비해 강하다. 기존의 실리콘보다 쉽게 반도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반도체로의 응용가능성이 탄소나노튜브가 꿈의 재료로 일컬어지는 이유일까. 아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선 같은 두께의 강철보다 1백배 이상 단단하다. 그러면서도 훨씬 유연하기까지 하다. 기존의 마이크로미터 탄소섬유는 1%만 변형돼도 끊어지는 단점이 있는데 탄소나노튜브는 훨씬 더 유연해 15%의 변형에도 견딘다. 이렇게 탄소나노튜브가 잘 부러지지 않기 때문에 공정이 매우 손쉬워진다. 한편 기존의 마이크로탄소섬유에 비해 밀도가 낮아 무게를 상당히 줄이는 효과도 가져온다.

나노과학은 탄소나노튜브처럼 기존에 존재했던 것보다 더욱 뛰어난 모습을 가지는 첨단 신소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실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고무처럼 질긴 것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바닥 세계에 빈자리는 많다’

한편 최근 과학소식을 살펴보면 너도나도 새로운 나노물질을 만들었다고 떠들썩하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크기가 1천여nm, 즉 1미크론(㎛, 1㎛=10-6m)으로 마이크로 수준인 것이 많다. 그래서 혼란을 가져올 때가 있다. 단지 ㎛를 nm 단위로 변환한 것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과연 어느 정도 크기가 나노기술에 속하는 것일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노기술의 정의를 살펴보면 1백nm 이하가 이에 속한다. 왜 하필 1백nm일까. 나노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이를 알아보자.

처음으로 나노세계에 관심을 표현한 과학자는 리차드 파인만. 그는 1959년 12월 미국 물리학회 모임에서 ‘바닥 세계에 빈자리는 많다’(there’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카멜린거 오네스가 극저온의 세계를 발견했던 것처럼 끝없이 새로운 장을 열어가는 것이 과학적 모험이라면서 원자나 분자 수준의 작은 크기로 물질을 조작하는 일에 대해 역설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24권의 브리태니커 사전을 침핀의 머리에 쓸 수 없는가’라는 파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공간이 충분하다’였다.

파인만의 말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이때 나노구조물을 보고 다룰 수 있는 도구가 개발됐기 때문이다. 주사형터널링현미경(STM, scanning tunneling microscope), 원자력현미경(AFM, atomic force microscope)을 포함한 전자현미경이 개발돼 나노의 눈과 손이 됐다. 이와 함께 컴퓨터 성능의 급속한 발전은 나노미터 크기의 물질에 대해 복잡한 시뮬레이션을 행하는 일을 가능케 했다. 이런 새로운 도구와 기술은 당시 과학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변하게 했다.

당시의 물질 제조방법 모형에는 물질을 1백nm이하로 소형화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새로운 도구로 인해 과학자들은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많은 분야의 과학자들은 열광적으로 개개 원자나 분자와 십만단위 분자사이 영역인 1-1백nm에서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고자 나노구조물을 만들고 분석했다. 바로 이것이 나노과학의 영역이다.

스스로 척척 기능하는 생체분자 모방

현재 생체분자처럼 원자나 분자가 알아서 어떤 물질로 만들어지는 방법인 자기조립이 활발히 연구중이다. 사진은 원자들이 일정 형태를 갖추는 자기조립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나노물질의 제조방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됐다. 이전까지 소형화 방식은 이미 존재하는 큰 물질을 깎아서 원하는 작은 크기로 만드는 것이었다(top-down 방식). 그러나 나노과학은 원자나 분자를 벽돌처럼 쌓듯이 조합해 완전히 새로운 나노물질을 제조하는 방식(bottom-up 방식)을 선보였다. 즉 top-down 방식이 물리적이라면, bottom-up 방식은 화학적인 것이다.

top-down 방식으로 제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적당한 원재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반도체산업에서는 소자를 만드는 원재료로 실리콘을 썼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후, 고른 원재료에 기능을 조각하는 것이다. 주로 이 방식은 반도체산업이나, 물질 표면에 어떤 패턴을 형성하는 리소그래피 기술에 쓰였다. 이를 통해 인간은 20세기에 마이크로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노물질을 만들고 연구하는 데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50nm보다 더 작게 만들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bottom-up 방식은 어떨까. 마치 레고블록으로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우선 화학적으로 벽돌역할을 하는 나노분자를 만든 후, 이를 쌓아서 최종물질을 만든다.

bottom-up 방식은 생체물질의 특징인 ‘자가조립’ 을 응용해서 나노물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생명을 이루는 물질은 스스로 원자와 분자를 질서있게 정렬시키고 배치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가조립이다. 만약 원자나 분자가 생명체처럼 알아서 척척 어떤 기능을 하는 물질로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 물질제조공정에 비해 훨씬 간단하면서도 비용도 절감되지 않을까. 이 때문에 자가조합 연구에 매달리는 과학자가 많다.

나노과학은 만능?

나노과학은 우리에게 어떤 미래상을 제시해줄까. 자신을 나노과학의 주창자라고 부르는 미국의 나노주의자 에릭 드렉슬러에 따르면, 나노과학은 만능인 것 같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로봇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옷, 음식, 집 등을 만든다. 이를 위해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노동이 필요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빈곤과 굶주림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드렉슬러의 작은 로봇이 아주 싼 가격으로 원하는 물건을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저렴한 재료로 음식을 합성할 수 있어서, 원한다면 먼지를 스테이크로 바꿀 수도 있다. 드렉슬러는 나노과학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획기적인 장치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나노과학은 이 꿈같은 일을 가능하게 해줄까. 아직 이 질문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은 “아직은 모른다”고 말한다. 나노과학은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할 정도로 초보 단계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나노과학의 미래상에 대해 상당히 말을 조심하는 듯하다.

20여년 동안 나노과학을 연구해온 서울대 국양 교수는 “현재의 나노과학에 대한 열광은 지나치다. 에릭 드렉슬러와 같은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현재 나노과학은 단지 무수한 가능성만이 열려 있는 상태다. 언제쯤 나노세계가 정복될 것인지에 대해 과학자마다 다른 예측을 내놓고 있다. 그렇기에 나노과학이 열어줄 진정한 모습은 아직도 안개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9년에 작성한 나노기술 연구에 관한 미국의 한 보고서에는 “나노기술은 21세기에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과학기술 분야가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제조, 의약, 국방, 에너지, 운송, 통신, 컴퓨터, 그리고 교육 등 전반적인 분야에 현재의 마이크로기술을 대체할 것”이라고 쓰여 있다. 이중에서 가장 먼저 효과가 기대되는 분야가 컴퓨터 소자이고, 가장 막대한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분야가 의약이다.

세계 각국 정부주도의 과감한 투자

또한 미국 대통령의 과학기술자문위원인 닐 레인은 1998년 4월 미국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만약 누군가가 제게 21세기에 신기원을 가져다 줄 차세대의 가장 유망한 과학기술 분야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곧 바로 나노기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생각을 반영하듯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이 분야에 배정했다. 2000년도에는 2백70억달러이던 것이 2001년도에는 전년도의 두배에 가까운 4백95억달러로 증액했다. 이 금액은 원화로 환산하면 약 5천9백40억원으로 우리나라 과학기술부 2001년도 전체 연구개발 예산인 4조1천억의 무려 14.5%에 이른다.

미국에 질세라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나노기술에 정부주도의 과감한 투자를 기울이고 있다. 세계는 지금 ‘인간게놈’이라는 화산폭발에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열을 뿜어내고 있는 ‘나노과학’에도 이만저만한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게놈이 단순히 기존의 생물학만의 연구대상이 아닌 것처럼, 나노과학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다방면 전문가들의 공동연구를 필요로 한다. 그야말로 21세기는 통합의 세기인 셈이다.

박미용<동아사이언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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