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뜨겁다]서먹한 분위기속 '반여공감대'

  • 입력 2001년 1월 28일 18시 49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와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이 우여곡절 끝에 28일 마주앉긴 했으나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지우지는 못했다. 이총재의 요청으로 이뤄진 이날 두 사람의 회동은 지난해 7월 이후 6개월여 만이다.

이총재는 권철현(權哲賢)대변인, 주진우(朱鎭旴)총재비서실장과 함께 승용차로 약속시간(낮 12시반)보다 2, 3분 가량 앞서 상도동에 도착했다. 5분쯤 뒤 김전대통령이 거실에 나타나자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 뒤 날씨와 배드민턴, 등산 등을 화제로 5분 가량 이야기를 나눴으나 한때 대화가 끊어져 서로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YS는 “수술한 뒤 건강해 보인다”는 이총재의 덕담에 “배드민턴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다. 영하 20도에서도 쳤는데 온 몸이 땀에 젖더라. 배드민턴공이 야구공에 비해 3배나 빠르다. 어제 아침에는 눈이 오는데도 쳤다”며 최근 취미를 붙인 배드민턴 예찬론을 폈다. 이총재도 “반사신경이 필요한 운동”이라며 “어디서 치느냐”고 관심을 보였다.

두 사람은 이어 배석자 없이 1시간20분 가량 비공개로 오찬을 했다. 오찬 후 YS는 대문 앞까지 나와 이총재를 배웅하면서 “표정이 밝아보인다”는 기자들의 얘기에 “나는 언제나 표정이 밝다. 내 표정이 어두우면 죽는 날이지”라고 답변했다. 이총재는 “대화를 많이 나눴느냐”는 질문에 “허허” 웃기만 하면서 승용차에 올랐다.

오찬에선 YS가 얘기를 많이 했으며 이총재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고 한나라당 박종웅(朴鍾雄)의원이 전했다. 다음은 권대변인과 박의원이 전한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대화 내용.

▽YS〓최근 ‘안기부 돈 선거자금 유입’사건은 전적으로 나에 대한 보복이며 탄압이다. 퇴임한 뒤 3년 동안 김대중(金大中)씨가 뒷조사를 했고, 이번에도 조사당한 사람들이 모두 내 직계 사람들이다.

▽이총재〓안기부 자금이 강삼재(姜三載)부총재에게 유입된 적도 없고, 강부총재가 정치자금과 관련해 김기섭(金己燮)전 안기부 기조실장과 의논한 적도 없다는 말을 믿는다.

▽YS〓야당은 언제나 야당다워야 한다.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자주 하는 것은 국민에게 좋지 않게 비쳐진다. 또 정치현안에 대해 더 강력히 투쟁해야 한다. 주위에서 여러 얘기를 하겠지만 판단은 총재가 하는 것이다. 경험 있는 사람들에게 많이 들어야 한다.

▽이총재〓지금 이 정권이 손해배상청구소송 등을 통해 야당의 목을 죄고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이 다 안다. 그러나 이는 정권의 자충수다. 법적으로도 문제가 안되고 성립될 수 없는데 이 정권이 실수하고 있다.

▽YS〓김대중씨의 대북 대처 방식이 굉장히 걱정스럽다.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지 도저히 모르겠다. 김대중씨가 앞으로 북한문제에서 급해지고 당황하게 될 것이다. 여러 가지 실수도 많이 할 텐데 우려된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절대 답방 못한다. 국민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인간이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이총재〓한나라당이 중요한 일을 하도록 하겠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싸워나가고 당을 지켜가겠다. 자주 찾아뵙겠다. 잘 좀 도와달라.

권대변인은 오찬 후 “현재 정국상황이 매우 혼란스럽고 위기상태라는 데 두 분이 인식을 같이했다”며 “시종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대여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고 밝혔다. 반면 상도동측은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등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권대변인은 YS가 문 앞까지 나와 배웅한 점을 강조했으나 상도동측은 “정치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이총재측이 소개하지 않은 YS 발언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총재측은 당초 신년인사를 겸해 상도동을 찾을 계획이었으나 ‘의원 꿔주기’ 사태와 ‘안기부 돈 선거자금 유입’ 사건 등이 터지는 바람에 방문계획을 유보했다. 이후 ‘안기부 돈’ 사건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양측간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이총재측이 다시 문을 두드림으로써 회동이 성사됐다. 서로가 필요해서 만난 만큼 양측이 좀더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번의 만남으로 양측이 그간 쌓인 감정을 모두 털어내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선대인기자>eodl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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