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광형/화투판과 정치판

  • 입력 2001년 1월 21일 16시 25분


우리의 전통 명절인 설이 다가왔다. 설날이 되면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 화투와 윷놀이를 즐기며 새해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번 명절은 그런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한국 경제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추위만큼이나 우리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있다. 거기다가 물고 뜯기며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정치판은 세상을 외면하고 싶게 만든다.

▼남 발목잡다 뒤로가는 정치▼

왜 우리만 유달리 저런 소모적인 정치싸움을 계속하는 것일까? 내가 어떻게 해서 잘해보겠다는 ‘포지티브’ 전략은 없고,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 깎아 내리려는 ‘네거티브’ 전략 뿐이다. 이런 일이 과거나 오늘이나 계속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우리 국민이 은연중에 이런 방식의 삶에 일상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네거티브 놀이문화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과도 무관한 것 같지 않다.

먼저 우리가 자랑하는 윷놀이를 보자. 이것은 기본적으로 윷을 던져서 그 숫자만큼 ‘말’을 진행시키는 매우 단순한 놀이다. 그러나 묘미는 ‘말판’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다. 승패는 윷을 잘 던지는 것보다 상대방의 말을 얼마나 많이 잡아먹느냐에 달려 있다. 즉 자신의 말이 빨리 가도록 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진행을 방해하는 네거티브 전략이 더욱 주효하다.

이런 네거티브 전략은 고스톱에서도 긴요하다. 고스톱에서 항상 이기는 사람은 자신의 점수를 올리는 데에만 열중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패를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데 더욱 치중한다. 만일 어느 한 사람이 ‘청단’을 하려고 하면, 나머지 두 사람은 즉각적으로 청단을 방해하려는 공동전선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서양사람들이 즐기는 포커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게임의 진행과정에서 상대방의 패를 나쁘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다만 나의 패가 잘 들어오기만을 바라고, 일단 패가 주어지면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없다.

서양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무관심하고 자기 일에만 몰두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특징이 포커를 비롯한 놀이문화에서 만들어졌고, 또 이런 놀이를 즐기다 보니 거기에 담긴 포지티브 전략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서양 정치인들의 선거운동을 봐도 포커 놀이와 비슷하다. 상대방을 깎아 내리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유권자를 위해서 얼마나 일할 수 있느냐에 주안점을 둔다.

이런 윷놀이와 화투판의 네거티브 요소는 우리 정치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조금만 앞서가면 뒷다리를 잡는 행태가 만연하고 있다.

이런 국민성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도 상당 세월 동안 3류 정치드라마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고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런 노력의 첫걸음으로 놀이문화를 포지티브한 내용으로 고쳐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궁여지책으로 고안해본 ‘밀어주기 윷놀이’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밀어주기 윷놀이는 기존의 윷놀이와 동일하다. 다만, 말판을 놓는 규칙에서 두 가지의 변형이 있다. 첫째는 나의 말이 상대방의 말을 덮치게 되면 잡아먹지 않는다. 그 대신 내가 진행해 간만큼 상대방을 밀어준다. 내가 ‘개’를 내어 상대방을 덮치게 되면, 상대방은 자동으로 ‘개’만큼 두 칸 앞으로 간다. 그리고 기존의 방식처럼 나는 한 번 더 윷을 던진다.

▼서로 밀어주면 모두가 클텐데▼

두번째 변형으로, 이렇게 상대방을 세 번 밀어주면 나의 말 하나는 공짜로 완주한 것으로 친다. 결국 상대방을 도와주면 나에게도 이익이 되는 결과를 보게 된다. 그래서 상대방을 많이 밀어주려는 포지티브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실험적으로 놀아보면 재미는 여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부정적인 생각의 틀을 다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희망적인 포지티브 놀이로 설날 아침을 열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리고 포지티브 고스톱도 고안하면 좋겠다. 그래서 이런 놀이를 하다가 어느덧 서로 밀어주고 협력하는 것이 나에게도 유리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포지티브 정치가들도 많이 나왔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이광형(한국과학기술원 미래산업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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