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신간]오만한 제국

  • 입력 2001년 1월 12일 19시 08분


◇오만한 제국/하워드 진 지음/아이정 옮김/524쪽 1만6000원/당대

하워드 진(Howard Zinn). 알파벳 Z의 그 독특한 진동처럼 이제 그의 이름만 들어도 미국의 지축은 흔들리는 것 같다.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행동하는 지성’으로 자리를 굳힌 대표적인 미국 좌파 역사학자가 그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 반전운동의 중심부에 그가 있었다. 미국의 중남미 개입 반대운동에도, 걸프전 반전운동에도 그가 있었다.

이제 은퇴해서 (보스턴대 명예교수) 대학 강단은 떠났지만 지식인 전사(戰士)인 그에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적인 ‘오만한 제국’ 미국이 아직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자유, 평등, 행복의 추구라는 그럴싸하고 찬란한 표막 속에 가려져 있는 미국의 반민주적인 실체를 드러내야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다.

하워드 진의 1차적인 관심은 미국 역사 속의 지배자들이나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반대로 피해자와 희생자들이며 그들의 시각에서 보는 역사이다.

백인들의 잔혹한 정복에 희생된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와 흑인들, 앵글로색슨―프로테스탄트 ‘토박이’들의 스산한 인종편견의 희생자였던 여러 소수 민족들,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들, 그리고 미국 제국주의에 희생된 제3세계 국민들. 이들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일에, 그리고 그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하워드 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서술은 가식이 없다. 문장으로서의 어떤 아름다움이란 찾기 힘들다. 투박한 문체, 섬뜩할 정도의 표현, 잔인할 정도의 일관성과 집요함으로 점철된 역사서술, 연대순을 무시하고 시공을 초월해서 끄집어들이는 예문 등.

그에게서 역사란 단순한 흥밋거리나 학문적인 논쟁의 주제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에 그대로 직결되는 것”이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 도시의 슬럼에서 허덕이는 흑인들, 걸프전에서 희생된 이라크 어린이들의 신음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도는 데 역사를 아름다움으로 치장할 필요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의 객관성? 그것 역시 하워드 진에겐 장식품에 불과하다. 그는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역사는 없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의 인종살육보다 연합국의 무절제한 폭격을, 사담 후세인의 폭정보다 미군의 공습을, 일본의 만행보다 히로시마의 원폭에 더 초점을 맞춘다.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자행된 처참한 대학살이나 이디 아민의 살인적 인권 침해나 다른 독재 정권의 비이성적 행위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적은 오직 오만한 제국, 미국이기 때문이요, 미국인의 입장에서 미국의 잘못을 깨우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 하워드 진의 ‘오만한 제국’은 우리 독자들에게 여러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반미 성향이 강한 우리 지식인들에겐 미국에 대한 사고의 정형을 더욱 결빙시킬 것이며, 그렇지 않은 부류에겐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혼돈을 가져올 것임이 틀림없다.

어떻든 그의 역사관은 극좌파의 단단한 빗장에 걸어 잠겼고, 역사해설은 소위 ‘정통’과 ‘객관’에서 저만치 벗어났다. 그렇다해도 그의 주장은 독특한 진동으로 우리를 뒤흔들 것이며,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 그 버거운 질문을 놓고 다시 한번 고뇌하게 만들 것이다.

김봉중(전남대 교수·미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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