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수형/‘안기부 돈 사건’ 추하지만…

  • 입력 2001년 1월 11일 18시 57분


지난 며칠 사이 하얀 눈이 대지를 덮었다. 대검 청사 앞 소나무에는 눈꽃이 아름답게 피었고 서울구치소 앞의 나뭇가지에도 흰눈이 소복이 쌓였을 것이다.

자연은 이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베푼다. 그러기에 자연은 강하고 위대하다.

어니스트 미란다. 멕시코계 미국인인 그의 생애는 추악했다. 1963년 18세 소녀를 납치해 강간하는 등 수 차례 강도 강간 등 흉악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를 드나들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법과 인권의 역사에 찬란히 빛난다. 1966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그가 애리조나 주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주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할 때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소판결을 내려 석방되도록 했다. 그로 인해 이른바 ‘미란다원칙’이 확립됐다. 아무리 흉악범일지라도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 즉 형사피의자의 기본적 인권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침해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법 자체는 이같이 자연처럼 공평하다. 추악한 미란다에게도 ‘법의 적정 절차(Due Process)’를 지키도록 했고 이로 인해 그는 법과 인권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안기부 돈 선거자금 유입’ 사건 수사는 어떤가. 범행 내용은 추악하다. 그러면 그 진실을 파헤치는 검찰의 수사는 적정 절차를 밝고 있는가.

정치권의 ‘수사 브리핑’과 명단유출 등에서 보듯 수사의 정치적 중립을 의심케 하는 일이 잇따라 터지고 있다. 또 검찰은 10여 차례의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았다고 하는데 그것만 가지고 수백개의 계좌를 합법적으로 추적했는지도 의문이다.

우리 검찰이 미란다라는 ‘추악한’ 범죄자를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도록 원인을 제공한 미국 경찰의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수형<사회부>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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