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발레리나 삶은 수녀와 같지요"

  • 입력 2000년 12월 26일 19시 06분


1966년 루돌프 누레예프와 마고트 폰테인이 파트너로 활약하던 영국 로열발레단은 세계 발레계의 중심이었다. 폰테인과 이 발레단의 발레 스쿨에서 마주친 한 동양인 발레리나의 대화.

“중국에서 왔어요?”

“한국인데요.”

“오, 거기에서도 발레를 하나요.”

새카만 머리카락과 유난히 반짝이는 눈을 가진 23세의 발레리나는 당시 이미 ‘발레의 전설’이었던 폰테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잊지 못한다.

그 때의 달콤한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김혜식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57).

◇"하고픈 일 하고 큰 상 받아 영광"◇

그는 제5회 일민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내가 받기에는 너무 큰 상”이라며 “발레가 좋아 발레를 따라 다녔고, 그 속에서 산 것 밖에 없는 데 뜻깊은 상까지 받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일민예술상은 동아일보 명예회장이었던 고 일민 김상만(一民 金相万)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일민문화재단이 매년 업적이 뛰어난 예술인 1명을 뽑아 수여하는 상이다. 김 무용원장은 62년 동아일보가 무용 발전을 위해 제정한 동아무용콩쿠르 제1회 금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영국 유학시절 일민 선생께서 ‘큰물에 나가 배워야 한다’며 유학비용을 선뜻 지원해 주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번 일민예술상을 통해 일민 선생께서 발레 밖에 모르는 내 인생을 다시 격려해 주시다니, 참으로 큰 인연입니다.”

◇'최초' 수식어로 이어진 외길 인생◇

그의 발레 인생에는 유난히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다. 최초의 발레 유학생, 최초의 외국직업발레단 입단, 최초의 여성국립발레단장, 초대 무용원장….

그는 스위스 ‘취리히 발레단’의 주역과 캐나다 ‘르그랑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를 거쳐 72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프레즈노 주립대 교수와 ‘프레즈노시립발레단’의 객원무용수겸 안무가로 활동하다 93년 국립발레단장으로 귀국했다.

“발레리나로 처음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더 힘들었지만 그때마다 용기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최초’라는 것은 일종의 해택입니다. 반드시 성공해 내가 얻은 ‘노하우’를 한국 발레계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발레계의 급성장이 그의 행보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립발레단장 시절 오디션 제도를 정착시켰고 단원들의 아르바이트가 금지되면서 직업발레단의 기틀이 마련됐다.

96년부터 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제자들이 국제콩쿠르에서 잇따라 입상했다. 지난 여름에는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 회장으로서 서울에서 열린 ‘세계 춤 2000 서울’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80년대는 볼쇼이와 키로프발레단 등 국제적인 발레단을 통해 발레를 ‘보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90년대와 2000년대는 한국 발레의 가능성이 확인되고 세계 무대에 진출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춤 2000 서울’은 그 꿈이 현실화되는 무대였다고 봅니다.”

◇영재전문학교 설립이 꿈◇

그는 ‘발레리나의 삶은 수녀와 같다’고 말한다. 발레 외에는 세상 일에 둔하고, 발레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습관 때문일 것이다. 72년 결혼하면서 “발레와 결혼 중 하나를 선택하면 좋겠다”고 말하던 남편 김주익교수(프레즈노대 식품공학과교수)도 이젠 ‘준 발레전문가’가 됐다.

젊은 시절부터 ‘사랑스럽고 감미로우며 고혹적인 발레리나’라는 평가를 받아온 그도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됐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폰테인을 처음 만나던 23세나 다름없다.

“나이를 밝힐 필요가 있나요. 그건 빼면 안되나요.”

“꿈이 없으면 어떻게 사느냐”고 강조하는 그는 발레 영재의 발굴과 러시아 바가노프 스쿨같은 체계적인 예비학교의 설립이 꿈이라고 말했다.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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