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책사람세상]독서의 내공없인 인터넷도 헛것

  • 입력 2000년 11월 24일 19시 01분


‘존경했지만 원체 말이 없었던 교수’(기형도의 시 ‘대학 시절’ 중) 한 분이 있었다. 그 분의 연구실 서가에는 몇 권의 사전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늘 한 권의 책만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한 권의 책은 정말 부지런히 바뀌곤 했다. 주자는 ‘독서법’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권의 책을 철저히 독파한 뒤에 비로소 다음 책을 보아야 할 터.” 그 분의 강의는 언제나 지적인 충일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서가이기도 한 작가 이문열은, 언젠가 TV 대담에서 자신의 독서 습관 같은 것을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읽는 책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책들은 목차, 서문, 전체적인 내용 등을 분명하게 파악해 둔다. 그렇게 하고 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필요할 때 어렵지 않게 읽고 활용할 수 있다.” 이문열의 상당수 작품은 동서고금의 다양한 주제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지적 스케일을 보여준다.

◆ 기본지식 쌓기가 우선

영국의 저명한 문필가 사무엘 존슨(1709∼1784)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특정 주제에 대해 직접 알고 있는 경우, 그리고 특정 주제에 대한 지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경우.” 전자의 지식이 현실태라면 후자의 지식은 일종의 가능태로서의 지식, 즉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아는 지식이다.

인터넷 덕분에,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거의 무한에 가깝게 다양화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이고 직접적인 지식이 결여된 상태라면, 다른 지식을 알 수 있는 길도 찾을 수 없다. 그런 상태에서 키워드 몇 개에 의지해 웹서핑에 나서 본 들, 건져 올리는 지식의 깊이와 넓이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텍스트와의 진검승부를 생략한 인터넷 경공술은 날개 없는 추락을 예고할 뿐이다.

◆ 고통스런 정신훈련 필요

구텐베르크의 은하계가 인터넷의 은하계로 바뀐다 해도, 은하계를 수놓는 수많은 별 하나 하나는 ‘사람의 무늬’(인문·人文)를 읽어내고 그 의미를 성찰하는 성숙과 섬세의 정신으로 인해 비로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독서는 바로 그러한 정신의 훈련이며, 다양한 종류의 훈련을 강도 높게 쌓은 사람만이 참으로 넓고 깊은 지식을 체득 활용할 수 있다.

최근의 다양한 매체 환경은 강도가 떨어지는 제한된 종류의 훈련으로 사람들을 내몰고 있으며, 이것은 이른바 지식정보국가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지식정보국가는 ‘클릭! 인터넷 속으로’가 아니라 클릭하기 전의 지난한 정신의 훈련, 곧 독서에 의해 가능하다. “우리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책이 아니라면, 왜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카프카의 말이다.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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