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봉자>두 여자의 눈물, 관객까지 울리진 못해

  • 입력 2000년 11월 22일 10시 30분


박철수 감독은 뚝심 하나로 충무로에서 20년간을 버텨왔다. 남들이 몇 십 억원을 들여, 몇 년의 기획 끝에 영화를 만들면, 그는 청개구리처럼 반대로만 갔다. 구차하지 않을 만큼만 쓰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허겁지겁 찍었다. <봉자>도 그런 영화다. 3억 원의 제작비로 단 15일 만에 촬영을 끝냈다.

"작년에 갑자기 자꾸 울고 싶어집디다. 어디, 내 대신 실컷 울어 줄 사람 없나? 이 영화를 만들기 전 내 의식을 사로잡았던 생각이 바로 그거예요."

아둔하고, 사는 데 능숙하지 못한 봉자(서갑숙)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다. 김밥을 꾹꾹 말아 쥐며 세상에 대한 분노를 눌렀던 그녀는, 그러나 박철수 감독의 바람처럼 실컷 울어주지 않는다. 눈물이 모두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싸구려 여행 가방을 들고 세상의 빈틈을 향해 걸어가는 소녀 자두(김진아)도 그랬다. 그녀는 오프닝 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꿈을 꾸지 않는다. 모두 말라버렸다."

서술어 '말라버렸다'와의 대구(對句)를 감안할 때, 꿈은 눈물과 쉽게 대치된다. 꿈이 말라버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소녀. 그녀는 바라는 것이 없기에 슬플 일도 없었던 것이다.

봉자와 자두는 눈물이 말라버렸다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사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봉자는 지긋지긋한 삶의 상처를 김밥과 백화수복, 사이비 종교 'UFO21'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으로 풀어버리고, 자두는 쉬운 섹스와 정처 없는 여행으로 풀어버린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여자의 만남은 기이하게 시작된다. 빌라 지하에 세 들어 사는 봉자네 집에 자두가 무단 침입하면서 두 사람의 야릇한 동거가 시작되는 것이다. 매일 백화수복에 취해있다는 이유로 김밥 집에서 쫓겨난 봉자는, 자신의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자두에게 말한다. "여긴 내 집이지만, 난 괜찮아. 이대로 있어도 돼!"

벌거벗은 채 한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은 쉽게 레즈비언 코드를 연상시키지만, 영화는 그것과 무관한 방향으로 사건을 틀어버린다. 봉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곽 순경(김일우)은 두 여자의 섹슈얼한 관계를 희석시키는 탈색제. 이 영화에서 봉자와 자두의 관계는 성적 코드를 넘어 좀더 고차원적인 '삶의 동반자'로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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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두 여자는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만 달랐을 뿐 비슷한 상처로 괴로워했던 사람들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여성을 범해왔던 UFO21의 교주. 그로 인해 상처를 짊어지게 된 두 여자는 물건을 내던지고, 경찰의 옷을 벗겨 스카치 테이프로 꽁꽁 묶고, 돈주고 여자를 사는 나이 든 할아버지를 죽이는 것으로, 푸성지게 한을 푼다.

한풀이를 끝내자 두 여자에겐 비로소 꿈이 생긴다. 꿈이 생겼기 때문에 말라버린 눈물도 다시 흐른다. <봉자>의 마지막은 차이밍량의 <애정만세>가 그랬듯, 롱테이크로 잡아낸 길고 지루한 눈물 신이다. "우리 울까?" "그래, 울자!" 펑펑 눈물을 흘리는 두 여자는 길고 오래 보여지지만, 감정은 둔감해지고, 관객의 눈에는 눈물 대신 의아함이 흐른다. 그들의 '눈물 이벤트'에 동참하기엔 <봉자>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상투적인 수순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다분히 연극적인 구성, 지나치게 과장된 두 배우의 연기도 관객의 감정이입을 막는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높은 영상미를 확보했으나, <봉자>는 연극적인 대사와 미장센, 지나친 교훈주의로 관객의 눈물을 마르게 했다. <봉자>는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퍼포먼스 같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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