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명퇴신청 돌입 '눈물의 외환銀'…"이젠 어디로 가나"

  • 입력 2000년 11월 21일 18시 33분


‘먼길을 가다가 갈림길에 이르러 내가 가야할 길이 어딘지 알 수 없을 때 이정표를 봅니다. ‘외환은행’이란 이정표를 보고 길떠나온 지 25년. 이제 또 다른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찾아보지만 그 곳에는 이정표가 없네요. 그동안….’(장모씨)

‘장차장, 흐르는 물은 선두를 다투지 않는다(流水不爭先)는 말이 있지. 변화라는 물결을 인생의 이정표로 삼아 살아가자꾸나….’(김모씨)

‘형과의 추억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 오래 간직하고픈 시간이었습니다. 몇날 전 함께 기울인 소주잔. 무지하게 그립네요.’(배모씨)

외환은행의 명예퇴직신청이 시작된 지난 주. 사내 전자게시판엔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회한의 글이 줄을 이었다. 은행은 독자생존으로 운명지어졌지만 ‘860명 감원’이 조건으로 들어 있었다. 각 부서엔 “아무개가 명퇴하는 게 사실이냐”는 문의전화가 끊이질 않았고 서울 명동의 저녁 거리엔 석별을 아쉬워하는 서러운 모임이 계속됐다. 지난 주 몇 차례의 환송회를 치렀다는 한 부장은 “무엇보다 능력있는 후배들이 다 나가는 게 걱정스럽다”며 말끝을 흐렸다.

명퇴신청을 한 박모(36)과장은 “다시는 대규모 감원이 없다고 약속했지만 외환위기 이후 벌써 3번째”라며 “조직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게다가 은행이 ‘공적자금만 축낸다’는 비난의 눈길에도 이젠 지쳤다는 것.

명예퇴직의 그림자는 은행권 전반을 옥죄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98년 1차 금융구조조정을 겪은 뒤 올해까지 은행원 1만4600여명(전체의 17%)이 직장을 떠났지만 다시 수천 명이 거리로 내몰릴 처지. 한빛은행은 이달 초 정규직원만 890명을 감원했고 서울은행도 650명을 떠나보냈다. 게다가 은행경영평가위원회가 ‘불승인’ 판정을 내린 4개 은행의 경우 대규모 감원이 불가피해 은행원들의 감원은 이제 시작이라는 불안감도 확산되고 있다.

직장을 연인 삼아 지내온 듯 외환은행의 이모씨는 자신을 ‘연인에게 버림받는 신세’로 표현했다.

“KEB 품에 안겨있을 날/가슴가슴엔 꿈도 야무지고 요란하였다/만나면 즐거웠고 헤어지면 그리웠다/지금 소박맞은 박색 신부 꼴로 혼자 거울 앞에 선다/잿빛으로 형편없이 쪼그라 들어/켜켜이 쌓인 피로 속에/수줍게 숨어있는/정떨어진 그리고 초라한 나의 초상/명퇴란 말은 불명예 퇴출임에도 마치 명예로운 퇴직인 양/우리가 너무 쉽게 학습돼 있음을/그리고 나는 서럽게 울었다/바람이 제법 찬 11월의 베란다에서/허공을 향해 소리없이 울었다.”

또 다른 명퇴 신청자는 아등바등 살아온 세월이 한스러운 듯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떠났다. “너무 낙망할 것도 안도할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인 것을. 그동안 앞서 달리며 뒤에서 숨가쁘게 달려오는 동료의 마음 고통을 얼만큼 생각했던가. 그저 미안할 뿐…”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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