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Digital]성폭력 피해여성들 두 번 운다

  • 입력 2000년 11월 9일 19시 31분


10월 서울지법의 한 법정. 친척의 강간으로 임신중절수술까지 받은 14세 여중생 이모양에 대한 증인신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텅빈 법정에서 강간 과정 등을 담담히 털어놓던 이양은 결국 “그 남자가 교도소에서 오래 살아서 영원히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양은 이 사건으로 경찰과 검찰을 거치면서 모두 4번의 조사를 받았다. 초기 조사과정에서 이양은 조사관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이해할 수 없는 ‘강간’이나 ‘발기’, ‘사정’ 등의 용어가 한꺼번에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또 강간의 지속시간과 성기의 크기, 특징까지 모두 진술하도록 요구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중복되는 질문도 많았다.

이처럼 성폭력 범죄 피해여성들은 수사기관의 피해자 조사과정에서 되풀이해서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상세하게 다시 떠올려야 하기 때문. 용기를 내 입을 열어보지만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조사를 받으면서 또다시 눈물을 쏟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경우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은 하루에 15명 이상. 그러나 상담이 고소로 이어지는 경우는 20%를 넘지 않는다. 법적대응시 감수해야 할 어려움에 대해 설명을 듣고나면 사건을 덮어버리는 여성이 많다는 게 상담소측의 설명이다.

가장 큰 문제는 피해 여성들의 신상비밀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 점. 경찰의 1차 조사는 대부분 수십명이 드나드는 공개된 장소에서 진행된다. 큰 소리로 질문이 계속되는 경우도 많다.

94년 4월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된 뒤 비공개로 법정 증인신문을 받도록 한 조항이 생겼지만 여성들이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은 여전하다. 채팅으로 만난 남성에게 강간당한 한 여대생은 담당 재판부에 “도저히 재판에 못 나오겠다”며 증언하지 않게 해 달라는 탄원서까지 보냈다. 이 여성은 재판을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하고 신분노출을 막아 주겠다는 판사의 설득에 결국 법관 전용출입문을 통해 빈 법정에 들어와 증언하고 돌아갔다.

불필요하거나 부적절한 질문이 많은 것도 문제. 피해 여성들은 성경험이 있는지와 강간을 당할 때 쾌감을 느꼈는지, 강간범이 사정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 등도 받는다. 적나라한 성적 용어를 사용하며 상황 묘사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이에 대해 여성단체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강요당했는지의 여부를 따지는데 사정 여부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느냐”며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질문은 여성들에게 정신적 고통만을 가중시킨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조사기관과 법원은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가해자의 죄질을 가늠하기 위해 밝혀질 필요가 있는 내용인만큼 피의자를 정당하게 처벌하기 위해서라도 여성들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는 입장이다.

술에 취해 실수했다는 이유 등이 받아들여져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경우가 많은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측은 “성범죄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에 대해 많은 여성들이 분노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며 “이는 어려움을 감수하고 법적대응을 할 의욕마저 꺾어버린다”고 말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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