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사생아' 양성하는 벤처정책

  • 입력 2000년 10월 25일 18시 54분


한국디지탈라인 정현준사장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일부 벤처기업인의 도덕적 타락과 정부의 엉성한 벤처정책이 합작으로 이뤄낸 '벤처식’ 범죄행위의 전형이다.

선량한 벤처기업인들이 밤을 벗삼아 기술을 개발하고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골몰해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사이비 벤처인들이 주가를 끌어올린 후 빠지는 투기꾼적 수법과 재테크를 통한 문어발식 기업확장에 몰입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불법행위를 묵인해준 당국자 혹은 사회 특권층들과의 검은 유착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벤처업계 풍토가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기본적으로 허점투성이 정책을 만들어낸 정부당국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정부의 벤처기업 양산정책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정부는 작년에 2002년까지 2만개의 벤처기업을 육성한다며 이를 위해 4조원의 기금을 만들어 퍼붓더니 올들어서는 2005년까지 벤처기업수를 4만개로 늘리겠다고 밝혀 양적 육성의지를 확실히 했다.

생존율을 선진국수준인 5%로 잡더라도 4만개를 육성하려면 80만개가 태어나 76만개가 망한다는 계산이다. 정부는 이에 수반되는 손실의 최소화 정책보다 벤처붐을 일으키는 데만 진력한 것이다.

양적 육성을 위한 정책은 허술한 자금관리로 이어져 시중에서는 이 자금이 '혈세 자판기’라는 빈축을 사면서 눈먼돈처럼 여겨지게 된 것도 정부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부가 투입자금의 회수를 위해 한계기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한 것도 생존을 위해 극렬한 경쟁이 전제되는 벤처업계의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정부가 벤처기업을 인증하는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막상 등록과정 또는 사후관리에 치밀하지 못한 것도 '사생아성 벤처’를 양성하는 한 원인이 됐다. 당국이 벤처등록을 받은 후 현장실사를 하는 비율이 20%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정부가 내부적 준비없이 졸속으로 벤처정책을 확대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이런 마당에 벤처기업들이 그 돈으로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 감독한다는 것은 애당초 바랄 일이 아니었다.

벤처산업이 21세기 우리경제의 새로운 성장엔진이라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럴 해저드를 유발시키거나 방지할 수 없는 현재의 정책으로는 제대로 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제2, 제3의 정현준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는 이번 사건을 교훈삼아 허술하고 조급한 벤처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기 바란다. 지금은 창업지원보다 옥석구분의 육성책이 요구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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