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PIFF소식]중앙 아시아, 그곳에도 영화가 있었네

  • 입력 2000년 10월 12일 11시 36분


거친 바람보다 더한 정치가들의 횡포가 질기도록 오래 남아있는 땅, 중앙아시아. 그곳에도 영화가 살아 있었다. 잡초 한 포기 자라지 않을 것 같은 중앙 아시아에서 낯선 영화문법으로 풀어낸 영화들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눈물을 끌어올리기도 하고, 인간의 섬약한 감성을 건드리며 절절한 마음의 파고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번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중앙 아시아 영화들은 황석영의 산문집 제목 마냥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영원한 고전의 향기-춘향전' '살롬 시네마! 마흐말바프가의 영화들'과 함께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특별전 중 하나로 묶여 소개된 중앙 아시아 영화들은 총 9편. '천산을 넘어온 영화'라는 거창한 제목 안에 모인 영화들은 문화 정책의 횡포를 견뎌온 나라의 영화답지 않게 새롭고 신선하다.

그 중 관객들에게 가장 좋은 반응을 얻은 영화는 카자흐스탄 출신의 아미르 카라쿨로프 감독이 만든 <마지막 휴일>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방향타를 잃은 카자흐스탄 젊은이들의 고뇌를 담은 <마지막 휴일>은 비틀즈의 노래와 마약에 찌든 젊은이들의 모습을 날카롭지 않은 어법으로 녹여내 많은 박수를 받았다. 타지키스탄에서 날아온 박티아르 쿠도이나자로프의 <루나 파파> 역시 1인칭 소설을 읽듯 친근한 독백으로 마술적인 사랑을 담아내 관객들로부터 열띤 호응을 얻어냈다. 이 영화를 관람한 소설가 김영하 씨는 "좀더 밝은 에밀 쿠스트리차 영화"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소개된 중앙아시아 작품들은 정치적인 색채보다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영화들이 더 많다. 키르기즈스탄에서 건너온 <양자>는 입양아 소년의 성적 호기심과 가족과의 불화를 담은 성장 일기 같은 영화이며,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만들어진 <욕망의 향기>는 젊은 소년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담은 꿈과 희망에 관한 영화다.

에르멕 쉬나르바예프 감독이 연출한 <삼각수의 땅> 역시 마약에 빠져 있는 스무 살 청년들의 흐트러진 삶을 담은 색다른 청춘 영화. 중앙 아시아의 '사람 사는 모습'을 생생히 담아낸 마이람 유수포바 감독의 <황색 들판의 계절>과 바이람 압둘라에프, 로라 스테판스카야가 공동 연출한 <불타버린 영혼> 등은 역사 속에 파묻힌 개인사를 절절히 보여주어 관객들로부터 "감동적이다"는 평가를 받았다.

쉽게 관람할 수 없었던 중앙 아시아 영화들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이 특별전은, 그러나 중앙 아시아 전 지역을 아우르는 데 실패했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중앙 아시아 영화는 구 소연방 소속의 중앙아시아인 카자흐스탄, 트루크메니스탄, 타지크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등 5개국 영화들뿐이다. 과거엔 거대 규모의 스튜디오까지 소유할 만큼 소련 영화계의 젖줄이 되기도 했지만, 소연방 해체 이후 재정과 언어 문제 때문에 쇠퇴의 길을 걸었던 중앙 아시아 영화들.

이슬람 문화의 전통과 신비주의 경향이 잘 살아있는 중앙 아시아 영화의 향기를 전해준 이 특별전은 새로운 영화에 굶주린 관객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기 충분했다는 평가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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