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빠름과 느림

  • 입력 2000년 10월 11일 19시 02분


과속(過速)이다, 아니다. 남북관계를 두고 벌어지는 속도논쟁이 한창이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그렇다. 마침내 진보적 시각의 최장집(崔章集·정치학)고려대 교수도 ‘과속’이라며 속도조절론을 폈다. 그는 남북문제 못지않게 내치(內治)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이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런데도 시선을 모으는 것은 그가 현정부 초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으로서 개혁이념을 뒷받침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야(與野)총재회담에서도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총재는 ‘과속’을 주장했으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과속론은 계속 번지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 정확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대북정책이 투명하지 못하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런 가운데 속도는 빠른 것 같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어느새 대통령의 입에서 국민투표 얘기까지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빨라야 할 것은 느리고▼

남북관계가 과속이라면 내치(內治)는 저속(低速)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속이랄 수도 없다. 아예 지지부진하거나 방향감각도 모호하다. 무엇보다 개혁이 그렇다. 정권 초기부터, 특히 지난 4월 총선 전후에는 온세상이 떠들썩할 정도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건만 달라진 게 없다. 정당이건 국회건 청와대건 다 그렇다. 이른바 공공부문 등 4대개혁 소리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나 성과는 지지부진하다못해 어떤 분야는 뒷걸음질까지 치는 판이다. 특히 공기업의 경우 개혁을 한다면서 사장을 비롯한 임원을 낙하산 식으로 내려보내니까 변화는커녕 조직 내 지역갈등만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준비도 전략도 없이 시작한 어설픈 의료개혁으로 애꿎은 국민만 죽어나고 있다.

개혁은 정권 전반기에 과감하게 해나갔어야지, 후반기에는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누가 발목을 잡아서…’개혁이 안된다는 판에 박힌 변명은 더 이상 먹혀들 수 없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현상을 보면 기막히게 빠른 것도 있다. 모든 게 빨리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특히 러브호텔의 확산 속도가 그렇다. 수도권 일대 신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러브호텔과의 전쟁’을 보면 도대체 어느 사이에 러브호텔이 주택가 학교 코앞에까지 들어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인지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세계 어디에 이런 ‘전쟁’이 또 있을까.

러브호텔을 옛날의 ‘은밀한 공간’이었던 보리밭에 비유한 작가 이윤기씨의 발상이 절묘하다. 저 멀리 있어야 할 보리밭이나 물레방앗간이 바로 어린이들이 드나드는 학교 부근에 버젓이 불 밝히고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느리지만 무거운 작업▼

정보화의 물결과 함께 모든 것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 빨리 가려면 무거워서는 안된다. 그러니 모두들 ‘가볍고 빠르게’ 가려 한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는 흐름이 문화계 한구석에는 있다. ‘가볍고 빠르게’ 대신 ‘무겁고 느리게’ 가보자는 것이다.

한 예가 도서출판 열린책들의 홍지웅사장(46) 얘기다. 그는 더위가 시작되던 지난 6월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25권을 펴냈다. 94년부터 7년 동안 제작비 3억8000만원에 광고홍보비를 합하면 5억원이 들어간 큰 작업이었다. 초판 2000질(질당 27만원)을 찍어놓고 이것을 못 팔면 출판사 문을 닫겠다고 했다. 이같은 초대형 기획물을 낸 홍사장을 가리켜 주위에서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무모하고 미련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철학과에 다니던 대학시절 ‘죄와 벌’을 시작으로 도스토예프스키에 미친 나머지 대학원에서는 아예 노문학을 전공한 홍사장으로서는 누가 뭐래도 느리지만 무거운 작업을 해 낸 보람을 안고 산다.

반갑게도 그의 ‘무모함’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예상과 달리 벌써 1200질 가까이 팔렸다는 소식이다. 연내에 2000질 소화는 문제없을 것 같다고 한다. 구매자들은 주로 지식인층이지만 대학원생은 있으나 대학생은 없고, 연예인은 있으나 정치인은 한 명도 없단다.

공자(孔子)는 이상적인 사회를 음악에 비유했다. 음악은 바로 빠름과 느림, 강함과 약함, 높고 낮음이 제자리를 찾아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빨리 제자리를 찾아야 할 곳은 역시 정치의 세계가 아닌지 모르겠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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