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부산영화제 개막작<레슬러>부다뎁 다스굽타 감독

  • 입력 2000년 10월 7일 13시 33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의 부다뎁 다스굽타 감독(왼쪽)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레슬러>의
부다뎁 다스굽타 감독(왼쪽)
1976년까지만 해도 부다뎁 다스굽타 감독은 저명한 경제학 교수이자 시인이었다. 그러나 딱딱한 학문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시와 소설에 정신을 적셔온 그는, 어느 순간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처음 관심을 갖고 접근한 영화 장르는 세상의 음지에 주파수를 맞춘 다큐멘터리. 얼마 후 사회성 있는 장편 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샤트야지트 레이와 함께 캘커타 뉴웨이브를 주도하는 인도의 대표적인 감독이 되었다.

이제는 인도를 넘어 세계적인 거장 감독으로 떠오른 그가 신작 <레슬러>를 들고 부산을 찾았다. 그러나 이번 내한은 그에게 홀가분한 여행이 아니라 버거운 짐이나 다름없다. <레슬러>가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문을 여는 오프닝작으로 선정되었으며, 감독 자신은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 안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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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부산영화제 개막작 <레슬러>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레슬러>는 뚜렷한 내러티브 없이 진행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영리한 영화. 두 명의 레슬러와 레슬러의 부인, 가면을 쓴 무희들, 하나님의 정신을 설파하는 교회 목사, 어린 아이, 세 명의 부랑자 집단이 엮어 가는 <레슬러>의 이야기는 하나의 정글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만큼은 또렷이 걸러진다. <레슬러>가 설파하는 메시지는 사랑과 희망만이 세상의 모든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항체라는 것.

<붉은 문>을 들고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한 이래 3년 만에 다시 부산을 찾은 부다뎁 다스굽타 감독에게 영화와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당신의 영화가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프닝작으로 선정된 것에 대한 소감은?

-내 오랜 친구이기도 한 김동호 위원장과 김지석 프로그래머에게 우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난 지금 너무 행복하다. 부산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올 때마다 한국의 젊은 관객들이 영화를 정말 사랑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제 PIFF 광장에서 핸드 프린팅 행사를 가졌는데, 몇몇 여학생들이 나에게 개막작으로 선정된 걸 축하하며 "꼭 보러 가겠다"는 인사를 건네 왔다. 비록 영어는 서툴렀지만, 그들에게선 영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느껴졌다.

-<레슬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무엇인가?

-한가지 주제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다. 이 영화는 두 명의 레슬러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고, 레슬러의 부인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며, 난쟁이들에 관한 영화이자 소년 매투에 관한 영화, 가면 쓴 무희들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정치적, 종교적, 육체적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당신은 영화의 내용처럼 사랑과 희망만이 사회적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나?

-내 이야기를 증명할 만한 적당한 예가 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레슬러>를 상영한 후 한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가 찾아간 레스토랑마다 인터뷰를 강력히 금지하는 것이다. 그때 난 베니스에서까지 폭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우린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인터뷰 장소를 찾아다녔고, 결국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 세상은 언제나 폭력에 노출되어 있지만 희망을 가지고 살다 보면 이렇듯 모든 걸 헤쳐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게 내 영화의 주제다.

-이 영화의 촬영지가 당신의 고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고 들었다. 또 당신 아버지의 첫 번째 직업이 영화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시골 역장이었다고 들었는데, 이 영화엔 당신의 과거가 얼마나 반영되어 있나?

-난 영화계에 입문하기 전 시와 소설을 썼다. 오래 전 내가 썼던 시 중에 난쟁이에 관한 시가 있었는데, 그게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프가 됐다. 힌두어로 쓰여진 시(詩)라 이 자리에서 읊어주긴 어렵고,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겠다. 한마디로 그 시는 난쟁이가 젊은 처녀에게 청혼을 하는 이야기다. "키 큰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당신은 불행해질 거예요. 내 사랑을 받아들여 준다면 당신만을 위한 세계를 열어주겠어요"라고. <레슬러>에도 비슷한 상황이 등장한다.

-당신은 경제학 교수로 이미 성공을 거뒀는데, 왜 갑자기 영화 감독이 될 결심을 했나?

-경제학 교수로 재직중일 때 난 정말 행복했다. 그러나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경제학 강의 보다 시 쓰는 일이 더 좋아졌다. 그 뒤 글 쓰는 작업을 줄곧 해오다가 우연한 기회에 영화계에 입문하게 됐다. 시는 아직도 내 영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제학도 물론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시보단 덜하다.

-여주인공의 발찌 소리가 다른 사운드보다 크게 부각되어 있는 것 같다. 그건 의도적인 것인가?

-난 영화의 사운드보다 침묵을 더 좋아한다. 이미지는 침묵 속에서 보여져야 하고, 굳이 사운드가 필요하다면 그땐 사운드가 이미지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타라(지아라 리)의 발찌 소리는 일부러 크게 들리도록 노력한 것이다. 인도 여성들은 대부분 발찌를 차고 다니는데, 그건 항상 여성들이 사슬에 묶여있다는 느낌을 준다. 난 발찌 소리를 거슬리게 만듦으로써 우타라가 "이게 바로 나를 묶고 있는 사슬이구나"를 느끼게 만들었다.

-뱀이 지나가는 장면을 롱 쇼트로 보여줬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에선 뱀이 악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인도에서 뱀은 오히려 선한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 일례로 인도에선 여성의 꿈에 뱀이 나오면 엄마가 된다는 속설이 있다. <레슬러>에서 뱀은 인간 세상과 대비되는 자연의 일부다. 자연은 인간의 폭력에 개입하는 법이 없으며, 그 나름대로 영원한 삶을 이어간다. 뱀은 자연의 일부로서 영원히 계속되는 무한의 이미지다.

-인도는 볼리우드(Bollywood)라는 애칭으로 불려질 만큼 영화 산업이 발달해 있다. 당신 영화는 인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나?

-지난 20년 간 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영화만 만들면서 살아왔다. 그건 때로 관객들에게 환대를 받기도 했고 때론 외면당할 때도 있었다. 인도에선 매년 800∼900편의 영화가 제작되는데, 그 중에는 오락성 있는 영화도 있고 개에게조차 보여주고 싶지 않은 영화도 있다(웃음). 언젠가는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내가 만든 다수의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나눠 봤으면 좋겠다.

-힌두교와 기독교의 대립을 영화 속에 담아낸 이유는?

-기독교는 이미 인도 내에 깊숙이 침투했으며, 또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힌두교와 기독교의 종교적인 대립은 여전하다. 실제로 인도에선 <레슬러>에 나온 것처럼 힌두교와 기독교의 종교 분쟁이 자주 일어난다. 난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폭력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때 먼저 종교에 얽힌 사건이 떠올랐다.

-라스트신에서 가면을 쓴 무희들과 난쟁이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영화 속에서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며, 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인지 궁금하다.

-영화를 만들고 난 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인도엔 영화에서처럼 난쟁이들만 사는 마을이 따로 있나요?" 솔직히 현실에서 그런 마을을 찾아보긴 힘들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런 마을은 없고, 그건 순전히 내 상상의 산물이다. 하지만 가면을 쓴 무희들은 우리 전통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실 속의 인물들이다. 난쟁이는 상상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댄서는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는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의 관계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상상과 현실을 그 나름대로 인정해준다면, 폭력에 대항하는 구세주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내 심정을 담은 결말이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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