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수집가 백중길씨]"자식같은 車…모두가 역사"

  • 입력 2000년 10월 3일 19시 05분


30년째 국산과 외제 자동차를 모아온 ‘올드카 수집광’ 백중길씨(57). 가족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자동차를 사 모은 그의 삶을 단순히 ‘자동차 수집 마니아’ 정도로 요약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오히려 그의 삶은 국내 자동차역사와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년 군에서 제대한 뒤 선친이 운영하던 자동차부품회사를 물려받은 그는 당시 국산차와 국내에 수입됐던 외제차들을 닥치는 대로 사 모았고 현재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 700평 창고에는 골동품 자동차가 100여대나 된다.

자동차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국내 도로를 달린 자동차 모델 하나쯤은 누군가 보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 교육용으로도 필요할 것 같고….”

그는 희귀 자동차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달려가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기어이 손에 넣었다. 딸만 넷인 그는 10여년 전 부산세관에서 통관이 안된 1935년식 포드승용차를 사기 위해 1년 동안 10여차례나 부산을 방문, 드디어 경매를 통해 구입하고는 득남한 것처럼 기뻐했다.

자동차를 자식처럼 아끼다 보니 가슴 아픈 일도 많았다. 90년 수해 때 경기 능곡 나대지에 보관 중이던 올드카 45대를 잃어버렸을 때, 국빈 의전용으로 사용되던 방탄용 캐딜락 리무진을 불하받았다가 정책이 바뀌어 다시 당국으로부터 폐차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식을 잃은 것처럼 가슴 아파했다.

그는 언뜻 보면 ‘갑부’처럼 보인다. 보유 자동차가 100대가 넘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하지만 자동차를 뺀 그의 삶은 온통 부실투성이다. 자동차를 사 모으는 데만 수억원을 썼기 때문이다. 아무리 폐차 직전의 차라고 하더라도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외제차는 1000만원 이상을 지불해야 했다. 거저 얻은 헌차라도 서너달 걸려 수리하려면 1000만원 이상 들어간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서 자동차 부품공장을 운영하며 번 돈은 모두 자동차 구입과 수리비용으로 충당됐다. 몇년 전 공장 근처에 간신히 마련한 그의 연립주택의 천장은 요즘도 빗물이 줄줄 새 손님을 맞기도 부끄러울 정도. 아직도 수천만원대의 빚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인 안숙자씨(53)와 네 딸에게는 늘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가족보다는 자동차에 비상금을 쓰는 일이 더 많다는 게 그의 고백. 그에게 자동차 모으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일종의 ‘역사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인간처럼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물건입니다. 누군가 사라지는 자동차를 보관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자동차역사는 사라지고 마는 거죠. 후대에 남기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과 함께 했던 자동차를 우리의 곁에 남기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마지막 꿈은 자동차박물관을 만드는 것. 보관하고 있는 차들을 인력과 비용 부족으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

“자동차 생산량이 세계 6위나 되는 나라에서 자동차박물관 하나 없다는 게 우스운 일이지요. 정부의 도움이 있다면 좋겠지만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박물관의 꿈을 키워나갈 생각입니다.”

▼영화-TV속 '그때 그 자동차'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속으로의 여행. 심야에 DMZ에서 총성이 울려퍼지자 남측에서는 미군 ‘60’ 트럭이, 북측에서는 러시아 ‘지스’ 트럭이 수십여명의 병력을 쏟아내고 잠시 후 양측 간 총격전이 벌어진다. 공동경비구역 내에는 군용지프 ‘험비’가 오가고, 북한 간부들은 80년대 모델인 벤츠 450을 타고 다닌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차량들은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 모두 백중길씨의 소장품들로 영화제작 때마다 빌려온다. 백씨가 없었더라면 20∼30년 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자동차가 등장할 수 없었던 셈.

요즘 SBS TV의 주말 인기 드라마인 ‘덕이’에서도 그의 소장품들을 볼 수 있다.

75년 제작된 신진지프와 월남전에 쓰였던 케네디지프 등이 등장, 당시 시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

지금까지 그의 자동차가 ‘출연한’ 영화와 TV 드라마는 대략 3000여편.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 ‘제3공화국’ ‘은실이’ 등 TV 드라마, ‘쉬리’ 등 영화에는 어김없이 그의 차들이 등장했다. 이같은 TV 드라마와 영화들 때문에 그는 한꺼번에 30여대의 차량을 ‘납품’하기 위해 밤을 꼬박 새워가며 차들을 수리한 적도 있다. 워낙 오래된 차들이라 손을 보지 않으면 촬영 도중 시동이 걸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

방송국이나 영화사에서 자동차 한 대를 하루 동안 빌리는 데 그에게 지불하는 돈은 30만∼50만원 정도. 최고급 승용차를 빌리는 것보다 더 비싸지만 그의 몫은 이 중 30% 정도에 불과하다. 등록된 차량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도로를 주행할 수 없어 부득이 견인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촬영기간이 3∼4개월쯤 되는 영화에 그의 차들이 출연하게 되면 통상 1500만∼2000만원 정도의 수입은 올린다. 주연급은 안돼도 조연급은 되는 셈. 이같은 수익금도 차량유지와 새 중고차를 사는 데 다 들어가기 때문에 정작 그가 돈 버는 일은 없다.

▼백중길씨 소장 車들▼

올드카 수집가 백중길씨는 어떤 차들을 소장하고 있을까?

그가 보유 중인 올드카는 국산과 외제를 포함해 모두 100여대.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국내 도로를 누비다 사라져간 차종의 90% 이상을 보관 중이다.

그의 자동차 중 가장 오래된 국산차는 55년 처음 국산 자동차로 등장한 ‘시발(始發)택시’. 국제차량공업사의 최무성씨 형제가 미군으로부터 넘겨받은 지프를 개조해 만든 것으로 국산 1호차이다. 이 외에도 65년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타와 합작해 만든 ‘코로나’, 삼륜용달 ‘T600’ 등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차들이 대부분. 62년 일본에서 수입돼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팔린 닛산의 ‘블루버드’는 보관 중 썩어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외제차도 60여대가 넘는다. 1911년 포드에서 제작한 핫로드를 비롯해 벤츠 구형모델 등을 보유 중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공식 의전차량으로 사용했던 미국 캐딜락사의 ‘플리트우드 리무진’도 눈길을 끈다. 이외에도 폴크스바겐 BMW 도요타 볼보 등의 사라져간 해외 명차들도 다수 보관돼 있다. 미제 군용트럭과 지프, 러시아제 군용트럭도 10여대나 된다.

<박정훈기자>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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