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섹스가 곧 죽음이라니…

  • 입력 2000년 9월 29일 18시 41분


섹스(性)는 곧 죽음이다? 섹스로 인해 새 생명이 탄생하고 섹스를 떠올리면 온몸이 환희로 끓어오르는데 섹스가 죽음이라니, 이 무슨 궤변인가.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에 따르면, 우리의 먼 조상님인 원시 생물은 섹스를 얻는 대신 죽음과 입맞춤을 했다고 한다. 기독교가 성을 타락으로 보는 것에도 그럴만한 과학적 근거가 있는가 보다.

우리는 왜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일까? 노화의 비밀을 캐는 생물학자들은 젊은 시절 우리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던 바로 그 유전자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등을 돌리며 우리를 죽음의 골목으로 몰아넣는 장본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생명의 궁극적인 ‘존재의 이유’가 보다 많은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라면 꼭 우릴 죽일 필요가 있을까? 야속한 일이지만 유전자는 한 ‘생존기계’에 목을 매는 것보다 낡은 기계는 가차없이 버리고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 쓰는 방법을 택했다.

저자들은 섹스가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생명이 섹스라는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섹스가 생명을 화려하게 창조했다는 말이다. 이 책에는 이처럼 성의 기원과 진화, 그리고 미래에 관한 여러 흥미로운 관점들이 설득력 있게 소개되어 있다. 나도 성을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저자들의 ‘거창한’ 설명엔 혀를 내두를 뿐이다.

거창한 주제와 씨름하는 것은 이 집안 가풍인 듯. 린 마굴리스는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 석좌교수이며 공생진화론으로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진화생물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TV 과학프로그램 ‘코스모스’의 호스트였으며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그 유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그의 남편이었다. 남편은 우주의 기원을 연구하고 아내는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던 말 그대로 ‘파워 커플’이었다.

내가 이 책을 추천하는 데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참으로 드물게 보는 탄탄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역자 홍욱희 박사는 미국에서 생태 및 진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돌아온 중견학자다. 나는 상아탑 감옥 속에 갇히길 거부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폭넓게 우리 과학에 공헌하는 그를 존경한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번역책들이 그야말로 물밀 듯 쏟아져 나온다. 번역이 활발하다는 것은 더 할 수 없이 반가운 일이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 드물기에 문제다. 원문을 읽지 않아도 무슨 문구를 잘못 해석했는지 훤히 보일 지경이다. 일본의 학문이 번역의 도움으로 한층 발전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도 이제 번역에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최재천(서울대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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