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시험없는 학교'와 교육여건

  • 입력 2000년 8월 25일 18시 50분


유인종 서울시교육감이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중학교에 ‘수행평가’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수행평가란 중간고사 기말고사 같은 정기적인 시험을 폐지하는 대신 평소 수업이나 과제물을 통해 성적을 평가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물론 서울 지역에 국한된 것이고 ‘단계적’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기는 해도 예정대로라면 당장 내년부터 ‘시험 없는 중학교’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수행평가가 아무리 시대흐름에 맞는 평가방식이라고 하더라도 몇 가지 점에서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학부모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학교 시험이 없어지면 아이들이 과연 열심히 공부를 할까 하는 점이다. 지금도 시험 때나 되어야 마지못해 책을 드는 아이들이 태반인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마저 없어진다면 공부를 놓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학부모 입장에서 당연한 반응이다.

수행평가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기 어렵다. 수행평가는 교사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이뤄지는 만큼 누구나 인정하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생겨난다.

우리는 수행평가가 큰 틀에서 우리 교육이 가야 할 방향이라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학부모들의 우려에도 타당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수행평가 제도는 현재 고교 1, 2년생을 상대로도 시행되고 있는데 이들 사이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큰 폭의 학력저하와 성적평가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수행평가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교육여건이 현저하게 개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교사 한명이 가르치는 학생수가 지금보다 훨씬 적어야 한다. 중학교 교사들은 한명이 최고 수백명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학생 개개인의 소질과 학업성취도를 일일이 파악하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학급당 학생수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해도 오랜 기간 시험점수에 의한 평가에 익숙해 있는 교사들이 창의력 표현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평가방식으로 전환하는데는 적응기간이 꽤 필요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수행평가가 도입된다면 그 결과는 교육현장의 대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좋은 교육이론과 제도라도 학생을 상대로 한 ‘실험’은 용인될 수 없다. 서울시교육청은 수행평가 도입을 서두를 게 아니라 충분한 준비기간을 거칠 필요가 있다. 수행평가가 가능한 교육여건을 만들려면 무엇보다도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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