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현대, 대북사업에 앞서 할 일

  • 입력 2000년 8월 11일 18시 51분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회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도로를 이용한 개성 관광과 서해안 공단 건설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남북교류에 한걸음 진전을 이룬 일임에도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냉소적이다. 공단 건설에 들어갈 막대한 투자비가 있으면 그 돈으로 빚부터 갚으라는 것이다.

금강산 사업도 아직 적자이고 대북 사업은 중단기적으로는 수익성이 낮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그동안 쏟아 부은 돈만도 어림잡아 6000억원에 이른다. 서해안에 공단과 기반시설(인프라)을 건설하자면 약 1조2000억원이 더 소요된다. 현대는 이를 모두 공단분양을 통해 조달하겠다고 했으나 현대그룹의 선투자 한푼 없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은 5조4000억원에 이르는 부채를 짊어지고 영업이익으로는 이자도 못갚을 지경이 돼 은행권의 도움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경제를 볼모로 정부와 6개월째 줄다리기를 한다. 실향민 출신인 ‘왕회장’의 평생 숙원사업도 좋지만 한국 최대의 기업집단이 대우 꼴이 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이며 그 때 가서 대북사업은 현대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현대에 대한 정부와 채권단의 대응도 오락가락해서는 안된다. 김경림(金璟林)외환은행장은 정주영(鄭周永)전명예회장 정몽헌회장에다 정몽구(鄭夢九)현대자동차회장까지 포함한 3부자의 퇴진을 요구하다가 하루만에 말을 바꾸었다. 김행장은 뒤늦게 “현대 스스로 밝힌 3부자 퇴진 약속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한 것이지 그게 현대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고 슬며시 발을 뺐다. 이렇게 정책상의 혼선을 빚고 당국자의 말바꾸기가 거듭되면 시장의 불신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정부가 대북 관계에서 신세진 것이 많아 현대의 버티기에 끌려다닌다는 시각이 생기는데 김대중대통령까지 거들고 나선 이번에야말로 현대사태를 시장의 원칙대로 반드시 마무리지어야 한다.

현대그룹도 더 이상 미루며 잔수를 부릴 시간이 없다. 소유 지분을 팔아 현대건설의 부채를 이자 감당이 가능한 수준으로 줄이고 계열사를 분리해야 한다. 부실경영 책임이 무겁고 분쟁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전문경영인들은 물갈이해야 한다.

정부와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이라는 ‘신북풍’으로 이번 사태를 적당히 넘기려 하지 말고 근본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해 한국경제의 뇌관을 신속히 제거해주기 바란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