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현희/독립은 피의 대가 였다

  • 입력 2000년 8월 10일 18시 55분


조선총독부 일제 침략 고위관리들의 식민지 지배에 관한 증언(동아일보 8일자 A2면과 A10면 보도) 내용을 보고 일제강점하에서 국내외 수많은 민족독립지사들의 확고부동한 민족독립사상의 건재와 침략 실상의 중심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찍이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시절 영문 대륙보 기자 너새니얼 페퍼가 쓴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총론을 다시 연상하고 안도의 숨을 돌렸다. 그 요지는 한민족이 밤낮으로 기원하는 바는 ‘독립(獨立)’ 두 글자뿐이라는 것이다. 독립을 얻기까지 한국인은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독립을 얻기 전에는 최후의 한사람까지 분투를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페퍼기자는 3·1운동 직후 한국에 들어와 1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한국인의 독립의지용기 집념 포부 등을 파악했다. 그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총독으로부터 고문당한 한국의 지사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면담하면서 왕성한 독립열기와 자신감을 확인하고 글을 남긴 것이다. 이 글은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사에서 발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내외에 보급했었다. 나는 이 글을 내 학술저술 머리말에 썼는데 이번 아사히신문에서 발굴한 육성녹음의 내용과 일치해서 감동과 흥분을 금하지 못했다.

친일파를 제외하고 과연 한국인은 모두 일치 단결하여 피침 35년 동안 일제에 항거했으므로 그 피의 대가로 우리는 8·15 민족의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세계 전쟁의 무임승차로 광복을 맞았다는 식의 인식이나 평가는 지양해야 할 것임을 이 기록과 솔직한 녹음 육성을 통해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사이토총독도 엉뚱하게 한국인에게 자유를 주었는데도 응집력을 통해 임시정부 지도자와 연계, 단합해서 조직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보고 “조선놈들은 두 셋만 모이면 손잡고 단결해서 우리에게 대든다. 정말 신물이 났다”고 발끈했던 기록들을 접했는데 그 실증이 이번 육성증언에서 다시 확인되고 있다.

1994년 일본 도쿄(東京)에 교환교수로 있을 때 동아일보 특파원과 함께 외무성 사료관에 보관중이던 이봉창의사의 옥중 상신서(上申書)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이의사의 옥중상신서 중에 혹시라도 그의 투탄(投彈) 의거에 회의를 느낀다고 하지 않았나 조바심을 갖고 읽어 나갔는데 시종 이의사는 한국의 30대 사나이답게 일왕의 폭살제거 미수를 아쉬워하며 그의 독자적인 애국행동에 떳떳함을 내비치고 있어 적이 안심했다.

이번에 알려진 일제 고위관리 등 120명의 육성증언은 일제가 패망해 쫓겨가면서 그들에게 불리한 문서를 거의 소각 폐기 처분한 마당에 생경한 내용이 재생산 보존돼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이제 그 연구의 심층화와 일제침략상, 그리고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저항의식을 굽히지 않고 지탱했다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불타는 기개 정의 진리 양심을 새삼 확인함으로써 앞으로 일제침략사와 저항사 서술에 방향전환과 재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육성증언에는 그나마 남아 있는 관련 자료에도 남기기를 꺼렸던 ‘완전점령의 시나리오’까지 담겨 있어 오럴 히스토리컬 머티리얼(구술역사자료)로서의 사료적 가치가 높아 사료의 취사선택 여지가 우리에게 주어져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번 육성증언에서 증언자들은 침략사실에 관해 꽤 조심성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어디에도 ‘침략’이니 ‘영구점령’이니 하는 것을 감추고 ‘보호’‘경영’‘우호’‘지원’같은 은어적 단어를 써서 이른바 한국침략 35년의 죄를 완전범죄화 내지는 증거인멸의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 같다.

사이토총독을 폭살하려다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우국노인 강우규의사가 취조중에 탁자를 두드리며 1시간 정도 독립사상 강연으로 일관해 취조자가 대경실색했다는 것은 그다운 민족정기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옥중에서 간디(40일)보다 8일을 더 단식 투쟁한 오동진은 모두 48일간 견디다가 공주감옥에서 순국했다고 장기수로 복역했던 이규창애국지사는 내게 증언한 바 있다.

“조선인의 독립사상, 의지는 통제할 수 없었다”는 공통된 그들의 증언에서 8·15의 민족광복이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현희(성신여대 교수·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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