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프로젝트21]자본주의 시그널…거리덮은 현란한 광고판

  • 입력 2000년 8월 1일 18시 27분


맨해튼은 그 자체가 거대한 광고판이나 다름없다. 대서양 너머 구대륙을 향해, 아니 우주공간을 향해 끊임없이 깜빡거리는 자본주의와 인공문화의 상징인 대형 사인보드. 하지만 이 사인보드는 계속 환한 빛을 발하는 네온사인이 아니라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끊임없이 명멸하는 전광판이다. 그리고 드러냄과 감춤의 미학은 그 전광판의 양전지와 음전지다.

뉴욕 맨해튼의 한복판에 있는 타임스스퀘어. 격자형 도로로 이뤄진 맨해튼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브로드웨이의 배꼽 쯤에 위치한 이곳은 그 빛의 한복판이다. 밀물처럼 밀려오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관광객들의 시선은 타임스스퀘어에서 소용돌이치며 수직으로 상승한다. 밀집된 공간을 가득 채운 어머어마한 규모와 현란한 색채의 광고들에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볼 수 밖에 없다. 마치 홍해를 갈랐던 모세의 기적이 도심 한복판에서 실현되는 듯 현혹적이다.

팬티만 입은채 엎드려서 함박웃음을 보내는 자키 속옷 광고모델의 거대한 사진, 각종 TV프로그램 광고를 내보내는 ABC방송사의 대형 모니터, 원통형 빌딩 자체를 스크린으로 증시현황과 더불어 각종 인터넷 콘텐츠 광고를 뿜어내는 나스닥의 전광판. 현란한 색채와 빛으로 자본주의의 광휘를 한껏 뿌려내는 공간이다. 미국의 코카콜라와 일본의 산토리 위스키, 한국의 삼성그룹 광고판 등이 겹겹이 쌓아올려진 다국적 광고탑은 마치 신의 분노로 언어가 달라져 뿔뿔이 흩어졌던 인류가 다시 쌓아올리기 시작한 바벨탑을 보는 듯 아득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광고내용을 뜯어보자. 상품광고보다는 콘텐츠광고가 압도적이다. ‘라이언 킹’과 ‘아이다’같은 뮤지컬은 물론 토니 블랙스톤과 크리스티나 아귈레라 등의 음반, 워너 브라더스의 영화와 각종 TV프로그램으로 가득찼다. 상품광고는 도요타 승용차와 코카콜라 정도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이는 더욱 뚜렷해진다. 뮤지컬, 영화, TV프로그램, 소설책에 최근엔 닷컴 등 각종 인터넷콘텐츠 광고 일색이다. 다른 광고라도 금융 통신 의료 교육 등 각종 서비스 안내 광고일 뿐 제품광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맨해튼은 이미 콘텐츠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광장이 아닌 밀실로 들어선 탓일까. 이곳의 광고들은 표현이 좀더 우회적이다.

뉴욕의 거리풍경으로 지하철 한칸을 가득 매운 흑백사진들은 첫눈에 무슨 광고인지 알 수가 없다. 썰렁한 거리풍경의 차이나타운에 선 한 중년여성, 주택가를 걸어가는 교복차림의 여학생, 주인의 손에 끌려가는 두 마리 강아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진 한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보일 듯 말 듯 컬러로 씌여있는 ‘Recycling’이라는 글자를 발견할 수 있다. 재활용을 권장하는 뉴욕시의 공공광고에서조차 메세지는 표면 뒤에 숨어있다. ‘About.com은 무엇에 관해서든지(about anything)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심지어 About.com에 대해서까지도’라는 인터넷 업체의 광고에서도 역시 이런 드러냄과 감춤의 숨바꼭질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아이러니는 브로드웨이 같은 관광객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뉴요커들의 생활공간으로 들어서면 더욱 확연해진다. 뉴요커들이 즐겨찾는 레스토랑과 유명 바는 간판조차 찾기 힘들다. 소호구역 머서가에 위치한 머서 호텔 레스토랑 앞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간판은 볼 수가 없고 겨우 유리창에 ‘(The Mercer) Kitchin’이라고 써있을 뿐이다. 그나마 머서라는 이름조차 구차스럽다는 듯이 괄호안에 들어가 있다. 소호의 유명 옷가게나 안경점들도 간판은 아예 없이 유리창에 보일 듯 말 듯 상호를 새겨놓은 가게들이 많다. 첼시에 있는 ‘LOT61’도 뉴요커들에게 인기높은 바지만 허름한 부두가 창고들 사이에 희미한 불빛을 내는 조그만 간판 하나로 겨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LOT61’의 바텐더 브라이언(28)의 설명.

“맨해튼에는 두 개의 구역이 존재한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가는 공간과 뉴요커들이 가는 곳은 별개의 장소다. 후자는 자신의 존재를 되도록 감추려고 한다. 그래서 진정한 뉴요커가 되려면 노훼어(Know Where)가 중요하다.”

이런 이중성이 조화를 이뤄 나타난 것이 플래그컬처(깃발문화)가 아닐까. 맨해튼에는 간판은 없어도 깃발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건물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도심속의 대학인 뉴욕대(NYU)의 수많은 건물들도 보라색 바탕에 흰색 횃불이 들어간 깃발을 통해 아이덴티티를 유지한다. 서울의 청담동쯤 되는 소호에서도 대로상에는 DKNY나 캘빈 클라인의 대형벽화도 보이지만 골목안에 위치한 아나 수이, 비비안 웨스트 등 유명 디자이너의 옷가게들은 대형 간판보단 오히려 각자의 독특한 색깔과 문양을 내세운 깃발을 선호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둑어둑해진 맨해튼의 밤거리를 걷다보면 문득 깨닫는다. 맨해튼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은 그곳이 번쩍번쩍한 네온사인의 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어둠속에서 깜빡이는 불빛처럼 반쯤은 모습을 감춘채 그렇게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점을.

[뉴욕〓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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