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프로젝트 21]뉴욕 벤처맨들 "일이 문화"

  • 입력 2000년 7월 18일 18시 50분


세계 디지털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실리콘 앨리(Silicon Alley). 문화예술의 중심지 뉴욕의 맨해튼에 둥지를 튼 수 백개의 벤처회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서부의 ‘실리콘 밸리’가 정보통신 첨단기술의 본산이라면 이곳은 닷컴 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디지털 문화의 산실이다.

실리콘 앨리 사람들은 주로 이메일 등 온라인으로 의사를 소통한다. 그러나 얼굴을 맞대고 몸과 몸이 부딪치는 아날로그식 만남도 중시한다. 실리콘 앨리의 중요한 문화는 다름 아닌 파티다. 다른 업체로부터 주말 저녁 파티 초대를 받으면 만사 제쳐놓고 참석하는 것이 이곳의 ‘비즈니스 상식’이다. 칵테일이나 간단한 음식을 들고 둘러서서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떠는 것이 파티 ‘콘텐츠’의 전부다. 파티를 통해 친분을 넓힐 뿐 아니라 자신의 회사를 알리고 최신 정보를 교환한다. 그래서 앨리의 파티는 ‘노는 비즈니스’로 통한다.

새로운 세기 디지털문화 생산지의 또 다른 특징은 ‘바쁨’이다. 실리콘 앨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문화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럴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댄다. 맨해튼 다운타운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앨리 기업인 ‘미디어팜’(www.mediafarm.com)의 브라이언(29)처럼 대개 “다른 뉴요커와 다를 바 없이 가끔 영화나 공연을 보고, 전시회를 찾아갈 뿐”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디지털문화란 무엇일까. 이곳에서 일하는 제레미 스탠튼(30)는 “그런 건 없다. 미디어는 새로운 문화의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할 뿐이지 미디어 자체가 문화는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브라이언은 “‘디지털 문화’란 용어도 없지만 그렇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마치 ‘언어 문화’나 ‘잡지 문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은 각종 문화가 섞인 용광로이며 각각 번영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일 뿐이다”고 설명했다.

미디어팜의 공동창업자인 앨리사 화이트(31)는 ‘실리콘 앨리’ 문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모험심’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이 일으킨 골드러시는 모험에 대한 자신감을 자극했기 때문에 벤처기업에 몰리는 20대의 청년정신이 30대 40대에도 광범위하게 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쁜 생활속에서도 앨리 젊은이에겐 자유스러움이 넘쳐 보였다. 직원이 100명이 넘는 큰 회사건 서너명에 불과한 신생 회사건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맡은 일이 다르고 능력에 따른 연봉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프로젝트 마감이 임박할 때를 제외하고 밤샘 근무는 거의 없다.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10시까지 일하는 것도 ‘중노동’으로 여길 정도. 복장도 반바지에 샌들을 신는 것이 보통이고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출근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앨리에는 출신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일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컴퓨터를 전공한 사람은 오히려 소수이고 경영학이나 인문학, 예술 관련 전공자들이 많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인재로 구성된 다국적 면모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의 다양한 소양이 실리콘 앨리를 움직이는 창의력의 근간을 이룬다. 앨리가 내놓은 다양한 서비스가 국제적인 파급력을 갖는 것도 이런 점과 무관치 않다.

여기서 근무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직장에 연연하지 않는다. ‘재미 없어졌다’는 이유로 6개월마다 회사를 옮기는 경우가 흔하다. 높은 연봉 보다 새로운 일감을 찾아 나서는 경향이 강하다. “아파트 구하기보다 일자리 찾기가 훨씬 쉽다”고 말할 정도. 출신이나 학력보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처리해본 경력을 제일로 여기는 풍토가 잦은 이직을 불러온다.

외형적인 성공 이외에 앨리 종사자가 중시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앤더스 램시(33)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인터랙티브 웹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커스틴 솔버그(31)은 “젊고 전도양양한 회사에서 지적이고 활동적인 일에 기여하는 즐거움”을 꼽았다.

하지만 ‘닷컴’에 몰아친 돈벼락은 순수한 ‘꿈’을 퇴색시킨 측면도 없지 않는 것 같았다. 브라이언 누네즈(31)의 말이 이를 대변한다. “초창기에는 디지털혁명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키겠다는 이상주의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 몇 년새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큰 돈을 버는 것이 최고가 됐다. 이제 삶의 질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브라이언은 ‘실리콘 앨리’에서의 ‘성공’에 대한 뼈 있는 정의를 내렸다. “자기 회사를 만들어서 키운 뒤 30세에 수 천만 달러의 재산가가 된다. 그 뒤에 다음과 같은 수순을 밟는다. 첫째, 회사를 팔고 새 사업을 시작한다. 둘째, 주간지인 ‘실리콘 앨리 리포터’에 표지인물로 나간다. 셋째, TV 탤런트나 영화배우와 사귄다.”

<뉴욕〓윤정훈기자> 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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