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교회세습

  • 입력 2000년 7월 3일 19시 08분


우리나라에 그리스도 교리가 소개된 것은 17세기 중국을 통해서였다. 중국은 1583년 마테오 리치라는 서양인 선교사가 들어와 천주교를 전파한 이후 베이징(北京) 시내에 천주교성당까지 세워졌다. 서양 종교와 함께 중국에 유입된 것이 서학(西學), 즉 서양 학문이었다. 천문 지리 기하학 등 서양 학문은 과학을 잘 몰랐던 중국인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베이징을 오가던 우리측 사신들이 자연스레 이 신학문을 접하게 됐고 그리스도 교리도 함께 이 땅에 들어오게 됐다.

▷세계 교회사에서 한국의 포교 사례는 희귀한 일로 다뤄지고 있다. 이방(異邦)의 성직자들이 희생을 치러가며 전교한 것이 아니라 서적과 교리서를 통해 자연발생적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순교자 이승훈은 1784년 스스로 베이징의 성당을 찾아가 조선인으로서는 첫 영세를 받았다. 국내에 들어온 최초의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는 국내 교인들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입국했다.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늦은 1885년 언더우드목사와 아펜젤러목사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선교에 나섰지만 현재의 교세는 천주교를 앞지르고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급속히 퍼지게 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교세도 가파른 성장세를 탔다. 우리처럼 단기간에 그리스도교가 정착된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며 우리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 교리가 갖고 있는 개혁의지 평등정신이 격변기 혼란기의 민족정서에 부합된 결과 교세 팽창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즘 종교계의 관심사는 광림교회 충현교회 등 국내의 내로라 하는 개신교교회들의 대물림이다. 새 담임목사을 선출하면서 전임 목사의 아들을 뽑았다는 것이다. 교회측은 정당한 절차를 거쳤다고 주장하지만 비판 여론이 거세다. 이 같은 세습은 공들여 가꾼 교회를 남에게 넘겨주기가 싫기 때문이라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초창기 한국 교회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때묻지 않은 개혁정신과 구원에 대한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교회 세습’이 이 같은 초심(初心)을 차츰 잃어가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면 교회로서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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