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파리망명 이유진씨/"분단 업보 벗고 싶어"

  • 입력 2000년 7월 3일 19시 01분


“남북정상회담의 개최가 남북한 주민 모두에게 우리는 한핏줄이고 우리의 공동이익은 분단조국의 통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빕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져 폐쇄적인 북한을 개방으로 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파리에는 여전히 ‘분단의 업보’를 짊어진 채 살고 있는 망명객이 있다. 대학 후배를 돕다가 북한공작원으로 몰려 20년 넘게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는 이유진(李侑鎭·61)씨. 최근 파리 15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심경을 들어 봤다.

▼후배돕다 北공작원 몰려▼

이씨는 “남북한 모두 체제유지를 위한 주체사상과 맹목적인 반공주의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온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를 지금까지 ‘냉전의 그늘’에 몰아넣고 있는 이른바 ‘한영길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79년.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부관장이던 한영길씨의 가출한 부인이 숨진 채 센강에 떠올랐다. 문책성 소환을 당하게 된 한씨는 망명을 결심하고 대학 선배인 이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씨는 한씨와 어린 딸을 파리 경시청에 데려가 망명 수속을 밟도록 도와줬다. 그 후 한씨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돼 버렸다. 중정은 당시 이씨가 한씨 부녀를 납치해 파리 주재 북한통상대표부로 데려갔다고 발표했다.

이씨는 △67년 동백림사건 구속자 선처 호소 △79년 ‘동포’ ‘자유평론’ 등 반정부 잡지 창간 △80년 김대중 구명운동 등 자신의 전력이 문제가 됐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후 이씨가 81년 북한의 고향방문 초청에 응하는 바람에 한국 정부와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한달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큰어머니와 사촌들을 만나고 평양 금강산 백두산을 돌아봤지만 인민과 당, 이념과 현실의 간격이 너무 크더군요.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준 파리, 기대를 품고 찾았다 아픈 마음으로 돌아섰던 평양, 75년을 마지막으로 25년 동안 가보지 못한 서울…. 나에게는 고향이 셋입니다.”

평양 출신인 이씨는 광복되던 해 가족을 따라 월남,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63년 프랑스로 가 파리5대학에서 심리학박사 학위를 받고 75년 프랑스 국적을 얻었다.

▼80老母와 서울재회 소망▼

현재 기소중지자 신분인 이씨는 입국 후 거쳐야 할 소명절차 밟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국가기관에 의해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썼으니 오히려 사과를 받아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근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학 교수에게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는 무조건 귀국이 허용되는 등 상황은 바뀌고 있다. 따라서 ‘자유인의 몸’으로 귀국해 서울에 홀로 살고 있는 80 노모와 누이들을 만나보겠다는 이씨의 소망도 머지않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파리〓김세원특파원>clai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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