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리포트]배종태/기업간 네트워크

  • 입력 2000년 6월 26일 19시 34분


미국 동부의 명문 하버드경영대학원은 97년 7월부터 실리콘밸리에 ‘캘리포니아연구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기업 사례 정리를 비롯한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하버드 MBA 학생들의 현장 실습과 취업을 돕는 곳이다. 이 연구소에서 3년 간 펴낸 60여개의 실리콘밸리 기업 사례 중 3분의 2는 하버드대 강의에서 사용되고 있다. 매년 1월이면 수백명의 하버드 경영대학원 학생들이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을 방문하고 취업할 회사를 찾는다. 뉴욕타임스는 18일자에서 대기업 경영자 사관학교로 인정받아 온 하버드경영대학원이 기업가 정신에 바탕을 둔 신경제 체제에 맞추어 실리콘밸리를 배우고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실리콘밸리와 보스턴은 미국의 대표적인 하이테크 산업지역으로 꼽힌다. 실리콘밸리는 50년대부터 반도체산업 중심으로 고성장을 해왔고 보스턴의 루트128(128번 고속도로 주변)은 60년대말부터 미니 컴퓨터 산업을 중심으로 지역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고용창출이나 매출액, 성장률 등 모든 지표에서 실리콘밸리가 루트 128을 제치고 하이테크산업의 대명사로 부상한다.

루트 128은 풍부한 자원과 기술을 가진 산업지역에서 출발했지만 실리콘밸리는 과수원 밖에 없는 농업지역에서 시작했다. 루트 128이 실리콘밸리에 추월 당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분교의 애널리 색소니언 교수는 산업시스템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기술과 시장의 변화가 심한 상황에서는 실리콘밸리처럼 지역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산업시스템이 루트 128과 같은 독립기업 위주의 시스템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메사추세츠공대(MIT) 등 학문적 배경과 GE 등 대기업 경험을 가진 루트 128은 대기업과 대학 및 연구소가 협력해 군수용품과 첨단 기술부품을 생산, 납품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해왔다.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보수적인 대기업 문화 덕분에 기업과 대학 등 경제 주체간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소원했고 개별기업 중심의 산업 시스템이 정착했다.

기업 내부에서도 수직적인 계층구조와 권위가 중시되고 직장 이동이 환영받지 못했다. 신생기업이 창업할 여지도 그만큼 좁았다. 루트 128의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거의 금융부문 출신이어서 기술적 배경이 없었고 ‘보수적인 은행’이라고 불릴 정도로 역할이 미흡했다.

이에 비해 대기업 경험이 별로 없는 실리콘밸리에서는 신생기업이 대거 등장,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치열한 경쟁을 거치면서 발전했다. 개방적인 문화와 새로운 전통은 직장 이동을 쉽게 받아들였고 엔지니어 출신의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하이테크 신생기업의 가능성을 미리 알아보고 자금과 경영, 인력 등을 지원해 성장을 도왔다.

실리콘밸리와 보스턴은 전통과 문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서 외국인의 눈에는 마치 다른 나라처럼 보인다. 미국 동부에서 오래 살다가 서부로 온 사람들은 “실리콘밸리는 미국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사장도 청바지를 입고 짐을 나르지만 동부의 보스턴에선 이런 광경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미국 진출을 꿈꾸는 우리나라의 기업가들이 미국을 전체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별로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배종태(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미국 스탠퍼드대 객원교수)ztb@gsb.stanford.edu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