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Digital]서울지법 '피고인 자기고백서' 색다른 시도

  • 입력 2000년 6월 21일 19시 17분


인간을 벌할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괴테가 남긴 말이다.

인간(범죄자)을 재판하는 법관들이 인간을 보려는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 김대휘(金大彙)부장판사는 최근 기소된 김모씨(27)에게 솔직한 자기고백 을 하도록 했다. 김판사는 이를 위해 피고인의 성행 및 환경 진술서 라는 제목으로 A4용지 3장 분량의 별도 서식을 만들어 김씨에게 줬다.

김판사는 진술서를 통해 △가족관계 △성장과정 △학교생활 △직업과 경력 △피고인 자신이 생각하는 성격의 장점과 단점 △범죄경력 △범행이유 △장래계획 등을 상세히 쓰도록 했다. 김판사는 또 김씨 가족에게도 진술서를 보내 작성하도록 하고 김씨의 학창시절 생활기록부까지 첨부해 제출토록 했다.

김씨는 바로 구치소에서 진술서를 작성, 21일 김판사에게 보내왔다. 그는 할 말이 많았다. 한 살때 아버지를 여읜 뒤 노점상 어머니와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낸 것에서부터 98년 어머니가 지병으로 몸져 눕자 자신이 서울 남대문 지하도 노점상에서 모자를 팔면서 어머니 병간호를 한 사연, 그러다 돈이 모자라 지하철 역에서 소매치기를 하다 잡힌 이야기까지 상세히 적었다.자신이 구속된 뒤에도 떠나지 않고 병상에 계신 어머니를 보살피는 약혼녀를 생각해서라도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는 김판사가 준 진술서가 모자라 별도로 A4용지에 21장이나 썼다. 김씨는 돈이 없어 변호사도 선임하지 못했다.

김판사는 김씨 어머니의 진술서가 도착하면 두 진술서를 면밀히 검토해 김씨의 형량을 정하는데 참고할 계획이다. 김판사는 사건기록만으로 범죄자를 보는데는 한계가 있다 며 어떤 사람이, 왜 범죄를 저질렀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알아보고 그에게 가장 알맞은 형을 선고하겠다 고 말했다.

범죄자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 을 보고 그에 합당한 벌을 주겠다는 것이다. 피고인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 는 의문에 대해 김판사는 설혹 그렇더라도 어느 한 구석에라도 진심은 드러날 것 이라고 말했다. 김판사는 다른 피고인들에게도 이같은 진술서를 작성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같은 범죄인과의 대화 는 서울지법 남부지원 형사합의부의 윤재윤(尹載允)부장이 두달 전 시작했다. 윤부장은 형사재판의 10%는 유무죄를 따지는 것이고 나머지 90%는 형량을 정하는 것인데 막상 피고인의 형량을 정하기 위한 기초자료는 경찰 수사단계에서 작성된 형식적인 인적사항 조사가 거의 전부 라고 말했다.

윤부장은 자신이 만든 진술서 서식을 법관 전용통신망에 띄웠다. 김부장과 윤부장의 글을 본 서울지법 판사 대부분이 범죄인과의 대화 를 계획하고 있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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