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범죄자)을 재판하는 법관들이 인간을 보려는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 김대휘(金大彙)부장판사는 최근 기소된 김모씨(27)에게 솔직한 자기고백 을 하도록 했다. 김판사는 이를 위해 피고인의 성행 및 환경 진술서 라는 제목으로 A4용지 3장 분량의 별도 서식을 만들어 김씨에게 줬다.
김판사는 진술서를 통해 △가족관계 △성장과정 △학교생활 △직업과 경력 △피고인 자신이 생각하는 성격의 장점과 단점 △범죄경력 △범행이유 △장래계획 등을 상세히 쓰도록 했다. 김판사는 또 김씨 가족에게도 진술서를 보내 작성하도록 하고 김씨의 학창시절 생활기록부까지 첨부해 제출토록 했다.
김씨는 바로 구치소에서 진술서를 작성, 21일 김판사에게 보내왔다. 그는 할 말이 많았다. 한 살때 아버지를 여읜 뒤 노점상 어머니와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낸 것에서부터 98년 어머니가 지병으로 몸져 눕자 자신이 서울 남대문 지하도 노점상에서 모자를 팔면서 어머니 병간호를 한 사연, 그러다 돈이 모자라 지하철 역에서 소매치기를 하다 잡힌 이야기까지 상세히 적었다.자신이 구속된 뒤에도 떠나지 않고 병상에 계신 어머니를 보살피는 약혼녀를 생각해서라도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는 김판사가 준 진술서가 모자라 별도로 A4용지에 21장이나 썼다. 김씨는 돈이 없어 변호사도 선임하지 못했다.
김판사는 김씨 어머니의 진술서가 도착하면 두 진술서를 면밀히 검토해 김씨의 형량을 정하는데 참고할 계획이다. 김판사는 사건기록만으로 범죄자를 보는데는 한계가 있다 며 어떤 사람이, 왜 범죄를 저질렀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알아보고 그에게 가장 알맞은 형을 선고하겠다 고 말했다.
범죄자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 을 보고 그에 합당한 벌을 주겠다는 것이다. 피고인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 는 의문에 대해 김판사는 설혹 그렇더라도 어느 한 구석에라도 진심은 드러날 것 이라고 말했다. 김판사는 다른 피고인들에게도 이같은 진술서를 작성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같은 범죄인과의 대화 는 서울지법 남부지원 형사합의부의 윤재윤(尹載允)부장이 두달 전 시작했다. 윤부장은 형사재판의 10%는 유무죄를 따지는 것이고 나머지 90%는 형량을 정하는 것인데 막상 피고인의 형량을 정하기 위한 기초자료는 경찰 수사단계에서 작성된 형식적인 인적사항 조사가 거의 전부 라고 말했다.
윤부장은 자신이 만든 진술서 서식을 법관 전용통신망에 띄웠다. 김부장과 윤부장의 글을 본 서울지법 판사 대부분이 범죄인과의 대화 를 계획하고 있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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