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적십자의 손길

  • 입력 2000년 6월 20일 19시 00분


적십자는 상처 입은 자의 붕대가 되어 준다. 적이건 아측이건, 피 흘리고 눈물 고인 자라면 어루만지고 위안을 준다. 그 갸륵한 손길은 바로 전장(戰場)의 참화에서 비롯한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한창이던 1859년, 스위스의 청년 실업가 앙리 뒤낭은 전화가 휩쓴 솔페리노 지역을 여행했다. 시체가 널브러진 마을에는 전상자들의 절규와 신음이 가득했다. 그는 정성을 기울여 전상자를 돌보면서 인도적인 의료 손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뒤낭은 적군 아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할 군의(軍醫)요원을 국제적으로 인정, 보호하자고 역설했다. 1863년 유럽 등지 16개국 대표가 제네바에 모여 그의 제안을 바탕 삼아 적십자규약 10개 조문을 채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후의 전쟁이 인도적으로 치러지고 전상자들이 보호받은 것만은 아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죽은 병사 숫자와 다친 군인, 찔린 포로들의 경험이 말해 준다. 적십자 정신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함몰되기도 했지만 그 역할은 지워지지 않았고 더욱 힘을 얻어 갔다.

▷적십자는 전쟁의 광기나 재난의 반대 ‘얼굴’이다. 전쟁 참화 기아 질병의 땅을 누비고 적시는 인간애의 상징이다. 그래서 가파른 대치, 치열한 전쟁은 늘 적십자의 얼굴을 앞세워 누그러뜨려지곤 했다. 6·25 동족상잔 20여년 만에 적십자회담으로 남북대화의 물꼬를 튼 것도 적십자였다. 70년대 이산가족 상봉을 주제로 남북이 처음 공개적으로 평양과 서울을 오가고, 84년 북쪽의 수재물자가 오고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이 실현된 것도 모두 적십자 깃발 아래서였다.

▷대한적십자사와 조선적십자회는 남북대화의 선도적 채널이 되어 왔다. 그래서 한적의 책임자는 총리를 지내거나 남북대화 대표급 인사가 앉고, 북적(北赤) 역시 ‘대남 정치 선전 전위 기구’에 걸맞은 비중 있는 인사가 앉았다. 90년대 중반 북한의 혁명 가극 ‘꽃 파는 처녀’공연을 둘러싸고 흐지부지된 남북적 대화가 23일 다시 열려 이산가족 상봉 문제 등을 논의한다고 한다. 정상회담으로 대화의 큰 틀이 마련된 남북 관계가 적십자회담에서 얼마나 손에 잡히는 결실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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