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조병화시인/등단 50년-시집 50년째 발간

  • 입력 2000년 5월 14일 19시 29분


등단 50년째 시집 50권. 팔순을 맞은 해에 겹경사다. 원로시인 조병화는 최근 ‘고요한 귀향’을 상재해 행복한 기록을 남겼다. 세계 시문학사에도 유례가 없는 일. 살아서 이만한 복을 누린 시인이 또 있을까.

봄비가 흩뿌리던 지난 주말,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원로시인의 작업실을 찾았다. 서울 수복 후 50년간 자리를 지켰다는 곳. 댓 평 남짓한 사무실은 수 천권의 책이 점령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였다. 과연 여기가 수 많은 사랑의 언어가 배출된 산실일까. 하지만 거기서 불쑥 튀어나온 시인의 얼굴은 어린애처럼 맑았다. 시인의 내민 손엔 뼈의 촉감이 느껴졌지만 따뜻했다.

겹경사에 대한 소회를 묻자 얼마전 썼다는 시를 대신 읽어줬다. “소감이 어떻소 당신의 물음에, 담담하면서 허전합니다, 팔십년 세월 나의 생애가, 한꺼번에 쑥 빠져나가는 공허감을 느낍니다, 절대 고독이 이뤄낸, 절대허무의 희열로 충만합니다.”

반세기를 시와 살아온 노시인은 ‘시는 나의 호흡’이라고 말했다. “나는 시를 살았지 만든 적이 없어. 내면의 소리가 그냥 날숨처럼 나온거지. 그래서 많은 시를 쓸 수 있었나봐.”

하지만 그의 왕성한 생산성과 대중적인 작풍을 흠잡는 사람도 없지 않다. 나직하던 시인의 목소리가 불쑥 커졌다. “과작은 수작이고 다작은 열작이란 구분법은 나쁜 선입견일 뿐이야. 난 솔직히 과작은 게으름 탓이라고 봐. 대중적이라고 책잡는 것도 내 시가 쉽게 써서가 아니야. 일반 사람들이 느끼는 죽음 사랑 고독 만남 이별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지.” 한참 동안 평론가를 꾸짖더니 “시는 독자와 얘기해야지 평론가하고 하는 게 아니다는 말을 꼭 써달라”고 덧붙혔다.

탈 정치적인 작품 세계란 지적은 어떻게 생각할까. “민주화나 통일을 지향했던 작가들이 나보고 역사의식이 없다고 그랬었어. 한 때는 내가 민족과 더불어 사는 게 아닌가 회의했던 적도 있었지. 지금은 노! 50권 시집을 다시 들쳐보니 이젠 자신감이 생겨. 내 시는 민족과 더불어 산 것이라고.”

필생을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썼다는 시. 그 신천지로 인도해준 것은 시인 김기림이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경성사범학교 물리교사가 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내도록 큰 힘을 줬다고. 그리고 “넌 부르주아, 난 프롤레타리아”라고 빈정댔던 김수영, 반대로 취중에도 세련된 매너를 잃지 않았던 박인환 같은 명동 술친구가 그립다.

지인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뿐 아니라 속속들이 밝힐 수 없는 사랑도 그의 시에 큰 동력이 됐다. 이번 시집에서도 ‘인생 팔십을 안개 어린 꿈을 더듬어오면서/ 나를 이끌어 준 것은/ 실로 그 맑은 사랑이었다’(‘어느 노인의 회고’)고 고백했다. 그는 선선히 부산 피난시절부터 애틋한 사랑을 키웠던 여인과의 로맨스를 들려줬다. 1955년 베스트셀러가 됐던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는 그녀와 헤어짐을 약속한 것이었다고.

그에게 사랑은 마르지 않는 영혼의 샘이며 젊음을 유지하는 불로초와 같았나 보다. “괴테 ‘파우스트’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와. 영원한 여성은 항상 우리를 끄집어 올려준다고. 그렇게 내 자신을 고양시켜주는 사랑이 시가 됐지. 그리고 영적인 사랑은 항상 그리움을 남겨. 그 그리움이 시에게 말을 걸지.”

때론 힘든 사랑의 상처도 없지 않았을 터. 유명한 시 ‘자화상’ 이면에서 그런 상흔이 언뜻 비친다. ‘버릴 것 버리고 왔습니다/ 버려서는 안될 것까지 버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작가는 50번째 시집을 유서로 생각했는지 묘비명을 미리 써 뒀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꿈의 귀향’).

남 신세지기 싫어서 그랬다지만 속뜻은 깊었다. “지금까지 썼던 많은 시들은 이 석줄을 쓰기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해. 이 세상 마지막 남길 내 결정이고 철학이야.”

노시인은 세상을 뜬 뒤에는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 같은 휴머니즘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면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자연과학도의 꿈을 이루겠노라고 했다. 세계 시인대회에서 계관시인의 호칭도 받았고 예술원 회장, 대학 부총장, 시인협회 회장, 문인협회이사장 등 명예도 누렸지만 그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웃었다. 몸소 문밖까지 기자를 배웅한 노 시인은 이런 덕담을 건넸다. “꿈이다! 꿈을 가지고 사는 거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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