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리포트(6)]배종태/사업계획서 작성요령

  • 입력 2000년 5월 14일 19시 29분


실리콘밸리에는 사업계획서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쇼클리반도체연구소를 뛰쳐나와 페어차일드사를 설립, 실리콘밸리 발전의 뿌리가 된 ‘8인의 반란자’ 가운데 두 사람인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이들이 68년 인텔을 창업할 때의 이야기다. 전설적인 벤처캐피털리스트(VC)인 아서 록은 두 사람이 식사하면서 냅킨에 남긴 낙서같은 메모만 보고 250만달러를 투자했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업체가 메모 한 장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 등장한 벤처 인큐베이터들은 사업 아이디어만으로 투자한 뒤 좋은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자금 조달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사업 환경이 너무 빨리 변하다보니 사업계획서를 제대로 만드느라 타이밍을 놓치기보다 일단 사업부터 시작하고 사업계획서를 만드는 게 낫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일부 사업계획서 없이 투자를 유치한 기업들도 1년 이내에 제대로 된 사업계획서를 마련한다. 사업계획서는 창업팀이 앞으로 하려는 사업이 무엇이고 어떻게 기회를 포착, 활용할 것인지 스스로 계획하고 점검하는 사업의 바이블이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

사업계획서는 창업팀이 주축이 돼 직접 만들어야 한다. 물론 고객의 특성 및 시장분석, 법률적 문제 등 각 부문별로는 관련 전문가들의 컨설팅을 받는 게 유용하다. 아이팝콘닷컴은 사업계획서를 다섯 차례에 걸쳐 수정하고 전문가들의 컨설팅을 받아 완성하는 데 25만달러를 들였다. 이 회사는 그후 창업자 아이크 리 회장의 투자를 포함, 1차로 200만달러를 조달했다. 사업계획서 작성에 얼마나 돈을 들일 것인가는 대상 시장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거대한 시장을 새로 만들어내는 경우에는 사업계획서 작성에 많은 자원과 전문인력이 투입된다.

실리콘밸리에선 ‘엘리베이터 피치(elevator pitch)’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당신이 설득해야할 사람과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면 내릴 때까지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아이디어를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업계획서도 이처럼 명확하게 핵심 내용을 잘 정리해야 하고 엔젤이나 VC 등 잠재적인 파트너가 원하는 정보를 먼저 전달해야 한다. 미국 VC들이 한국 기업에 요구하는 것은 사업계획서를 미국 코드에 맞춰달라는 것이다. 알고 싶은 정보는 잘 안나타나 있고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세부 기술에 대해서만 잔뜩 늘어놓은 사업계획서를 계속 읽어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리콘밸리의 VC들은 비타민보다는 진통제를 원한다. 기존의 것보다 더 편리하고 성능이나 가격면에서 유리하지만 없어도 그만인 제품보다는 아직 기능이 불편하더라도 고객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에 더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훌륭한 사업계획서는 제품이 무엇인지도 설명하지만 왜 이것이 필요하고 어떻게 기회를 실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실리콘밸리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벤처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도 계획이 아니라 프레드릭 터먼 교수의 비전에 의해 만들어졌다. 세부 항목은 잘 정리됐지만 창업팀의 비전이 명확하게 나타나있지 않은 사업계획서는 ‘향기없는 꽃’과 같다. 사업계획서 작성 이전에 창업팀이 비전을 명확히 하고 서로 공유하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배종태(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현 스탠퍼드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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