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는 세상]성북자활센터 '노숙자에 헌옷 나눠주기'

  • 입력 2000년 5월 5일 20시 40분


"한 벌의 헌 옷이지만 제겐 열벌의 수십만원짜리 새 옷보다 소중합니다." "이웃들의 작은 정성입니다.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용산역앞 광장.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성북자활지원센터 정호성(鄭晧盛·42)실장을 비롯, 7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나눠 준 옷을 몸에 맞춰보는 250여명의 노숙자들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몸둘 바를 몰랐다.

이들은 연신 고맙다 는 감사의 말을 건네며 정실장의 손을 꼭 붙잡기도 했다. 오랫동안 주위의 무관심과 냉대를 받으며 '밑바닥'을 살아온 노숙자들. 이날 뜻밖의 옷선물 은 오랜 가뭄끝의 촉촉한 단비처럼 이들의 가슴을 적셔주었다.

두달전부터 매주 한 차례씩 서울 용산역과 영등포역일대의 노숙자들을 찾아 '사랑의 헌옷 나누기 행사'를 벌여온 정실장은 "이웃의 작은 배려가 소외된 이들에게 큰 격려와 사랑으로 전달돼 보람을 느낀다"며 환하게 웃었다.

▼재활용-품앗이 이중효과▼

97년 저소득층의 자활사업을 위해 설립된 지원센터가 헌옷 나누기 캠페인을 시작한 것은 2년전.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에서 이미 중요한 자원재활용으로 생활속에 뿌리내린 헌옷나누기를 IMF사태이후 생활고를 겪는 실직가정에 작은 보탬을 주기 위한 '아이디어'로 채택한 것이었다.

장롱속에서 잠자는 헌옷을 어려운 형편의 이웃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자원재활용'과 '품앗이'라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것. 주민들의 호응으로 최근 '늘푸른 마을'이란 브랜드로 모은 헌옷들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매장까지 개설하는 등 캠페인에 성공을 거둔 정실장의 눈에 노숙자들의 남루한 옷차림이 띄었다.

'이들에게 이웃의 온정을 입혀주자.' 정실장과 자원봉사자들은 곧장 두 대의 트럭에 1000여벌의 옷을 싣고 노숙자들이 밀집한 역전으로 달려갔다.

▼직접 돌아다니며 헌옷 모아▼

서울시내 150여개의 교회와 각종 자선단체를 비롯, 주택가에 설치된 수거함에서 매일 직접 거둔 헌옷가지를 노숙자들에게 한 벌당 100원씩을 받고 나눠줬던 것. "노숙자들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럴 여유가 없으면 무료로 나눠주고요."

그러나 오랜기간 따뜻한 인정을 느껴보지 못한 채 거리를 전전해 온 노숙자들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기란 쉽지 않았다.

"저러다 말겠지." "이번엔 또 어디서 나왔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거나 술이 취해 행패를 부리며 행사를 방해하는 일부 노숙자들을 설득하고 타이르기를 수차례. "서로 먼저 많은 옷을 차지하려고 욕설과 주먹다짐까지 벌이는 노숙자들을 뜯어 말리느라 곤혹을 치루기도 했죠."

그러나 행사가 거듭되면서 정실장 일행의 '진심'에 감동한 노숙자들은 스스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거나 행사장의 질서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전 행사장에서 말썽만 일으켰던 한 노숙자가 옷을 건네 받은 뒤 '지금은 100원의 여유조차 없으니 나중에 벌어서 갚겠다'며 꾸벅 절을 하더군요. 마음의 벽을 허문 그가 어찌나 고마운지…."

그러나 시련도 있었다.정실장은 옷의 수거나 분류작업 등 현실적인 어려움보다 "괜한 일을 한다"는 주위의 편견에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다.

"노숙자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돌봐야 할 이웃이며 이들에게 헌옷을 나눠주는 것은 자원재활용의 차원을 넘어 곧 희망을 나눠주는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아파트단지등 동참 절실▼

요즘 정실장에게 '작은 고민'이 생겼다. 행사가 알려지면서 노숙자들의 '옷 수요'가 크게 늘어 현재 수거량만으론 행사를 지속하기가 힘들어진 것. "대형아파트 단지나 각종 자선단체에서 옷을 거둬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웃사랑을 위한 작은 실천에 동참해주세요." 02-927-2420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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