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Digital]증권사 고객통화 녹음, 사생활 침해 위법 시비

  • 입력 2000년 4월 26일 18시 57분


주식투자자 A씨는 최근 자신이 거래하는 모 증권사 지점 직원으로부터 “3월OO일 여직원에게 전화 매수주문을 내면서 한 통화내용 녹음을 금감원에서 조사자료로 달라고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자신의 전화통화 내용이 녹음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기 때문. A씨는 “나는 그 여직원과 잘 아는 사이여서 매수 주문 이외에 사적인 대화도 많이 했으므로 제3자에게 공개하면 절대 안된다”며 “만일 공개하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반발했다.

A씨는 “통화내용이 녹음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증권사에 전화할 때 말을 조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몰래 녹음기’를 작동시키는 증권사 입장은 분명하다. 분쟁발생에 대비해 증거를 확보하겠다는 것. 증권사가 고객의 전화주문 내용을 녹음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부터. ‘필요한 경우’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자동으로 녹음장치가 작동한다. 그러나 현재 30여개 증권사 대부분이 본사 차원의 중앙집중식 녹음시스템을 가동하거나 준비중이다. 이제는 전 지점과 본점 영업팀의 직원이 수화기를 드는 순간부터 녹음이 시작된다.

일괄녹음은 98년 8월 금융감독원이 증권사 감사담당자 회의를 열면서 증권사에 ‘권고’하면서 급속히 확산됐다.

증권사 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체 및 개인들도 고객 또는 상대방과의 통화내용을 무차별적으로 녹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현재 판매되는 전화기의 3분의 1 정도가 통화내용이 자동녹음되는 전화기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포괄적 무차별적인 통화녹음은 사생활 침해 및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김기중(金基中)변호사는 “통화내용을 몰래 녹음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라며 “형법에 사생활 침해죄가 없기 때문에 범죄가 될 수는 없지만 민사상으로는 명백한 불법행위로 손해배상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김변호사는 “증권사 등 녹음하는 주체의 부주의 등으로 녹음 내용이 공개될 경우에는 더 큰 분쟁과 위법시비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성호(朴成浩)변호사는 “통신비밀보호법은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증권사 직원과 고객이라는 ‘자연인’의 대화를 증권사라는 ‘법인’이 포괄적 무차별적으로 녹음하는 것은 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박변호사는 “증권사가 일방적으로 녹음하고 보관하기 때문에 분쟁발생시 증권사가 유리한 부분만 발췌해 증거로 제출할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차병직(車炳直)변호사는 “통화 녹음이 불가피하다면 사전에 고객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며 “위법소지를 없애려면 지하철 안내방송처럼 고객이 전화해올 때마다 통화내용이 녹음된다는 사실을 자동음성녹음으로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수형·김승련기자>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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