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호택/아시아의 네포티즘

  • 입력 2000년 4월 20일 21시 06분


아시아 정치에 관한 외지 기사를 읽다 보면 네포티즘(nepotism)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집권자가 자녀와 친인척을 주요 공직에 등용하거나 그들에게 이권을 나눠주어 돈을 벌게 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딱 들어맞는 우리말을 찾기 어렵다. 아시아에서 네포티즘이 가장 심한 나라는 이라크 싱가포르와 수하르토 전대통령 시절의 인도네시아일 것이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장남 우다이는 신문사 TV방송국을 거느린 언론재벌 회장으로 최근 99%의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차남 쿠사이는 공화국수비대장에 국가안보장관을 겸직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 전총리가 지금도 선임장관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장남 리셴룽은 부총리로 고촉통총리의 후임 물망에 오르내린다. 차남 리셴양은 이 나라에서 제일 큰 기업인 싱가포르텔레콤의 사장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하르토 전대통령의 32년 집권기간에 그의 자녀 등 일족이 400억달러를 치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하르토의 자녀 6명은 260여개 기업을 거느리며 독점 이권개입 등을 통해 인도네시아 최대의 가족재벌을 형성했다.

북한에서도 김일성 치하에서 네포티즘이 만연하다가 종국에는 세계 유일의 사회주의 왕조를 창건했다.

미국에서는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권경쟁에 나섰고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는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네포티즘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부시 주지사는 아버지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주지사에 당선됐고 힐러리는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과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접전을 벌이고 있다.

이번에 목포에서 당선된 김홍일의원도 민주당 공천이 거의 당선으로 통하는 지역이 아니라 출신지역별 인구분포가 고른 수도권에서 치열한 선거전을 치렀더라면 네포티즘 시비의 소지를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김의원이 작년에 후원금 모금액 1위를 기록한 것도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썩 좋게 비치지는 않는다. 이제 집권 중반기를 맞는 김대중대통령은 가족과 친인척들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아 네포티즘의 요소를 걷어내야 할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권이 바뀌면 네포티즘이 가장 먼저 개혁의 칼을 맞는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동생 경환씨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을 시켰다가 결국 쇠고랑을 차게 했고 형 기환씨도 권력형 비리를 저질러 옥고를 치렀다. 문민정부 시절 국정을 주무르고 인사를 농단하며 기업인들로부터 수십억원대의 돈을 받은 김현철씨는 공직에 취임한 적이 없으니 네포티즘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인도네시아에서는 검찰이 수하르토와 여섯 자녀의 부패 혐의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유전자를 물려준 자녀에 대한 부정(父情)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지만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최악의 네포티즘으로 발전시킨 불행한 지도자의 말로가 어디로 치달을지 알 수가 없다.

황호택(기획팀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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