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한경직목사의 무소유 한평생

  • 입력 2000년 4월 19일 23시 28분


19일 타계한 한경직(韓景職)목사는 복음주의적 신앙관으로 한국 장로교의 ‘장자(長子)교회’인 영락교회를 담임해 오면서 일평생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한 채, 예금통장 하나 없이 지내온 청빈과 겸손의 목회자였다. 그는 또 개신교계의 최고 원로이면서도 교회 안팎의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않았고 자식에게 강단을 세습하지도 않은 진정한 ‘한국 목회자의 표상’이었다.

1902년 평안남도 평원의 한 산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소학교에서 성경을 처음 접했다. 1916년 독립운동가 이승훈(李昇薰)과 조만식(曺晩植)이 교편을 잡고 있던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해 민족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이 곳에서 ‘민족’ ‘근면’ ‘성실’의 덕목을 익혔다.

그는 1922년 평양 숭실대에 입학해 화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꿨다. 이후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유학했으며 폐결핵으로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뒤 1933년 신의주 제2교회 목사로 목회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1945년 공산당원들의 습격을 피해 월남했으며 그의 가족과 친지 27명이 그해 12월 첫 일요일에 서울에 모여 예배를 본 것이 오늘날 세계 굴지의 장로교회로 성장한 영락교회의 출발이었다.

정통 장로교 교리를 신봉한 한목사는 지성, 신앙체험, 신앙의지 3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가르쳤다. 1973년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서 연합집회가 열렸을 때 폭우가 내렸지만 수천 명의 신자들이 “이 비는 축복의 비이므로 모두 맞읍시다”라는 한목사의 말 한마디에 모두 앉은자리에서 예배를 마칠 정도로 그는 신도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퇴임 후 영락교회가 한두 차례 후임자로 인해 시련을 겪게 되자 “신앙생활은 목사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득하며 교인들의 동요를 막았다.

은퇴 후 한목사는 교회에서 마련해 준 아파트를 뿌리치고 경기 광주군 남한산성 인근 영락교회 수양관의 20평짜리 사택에서 기거하면서 92년 템플턴상 상금으로 받은 100만달러를 모두 영락교회에 전해 선교와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하도록 했다. 정작 자신은 개척교회 목사를 만나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기 일쑤여서 항상 소매끝이 닳은 양복을 입고 다닐 정도였다.

전국에 500여개의 교회를 개척한 한목사는 말년에 100만원가량의 원로목사 봉급도 선교회와 사회복지단체에 기부하면서 반드시 영수증을 챙겨 제대로 기부됐는지를 확인했다. 또 “자기 합리화를 피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서전을 쓰지 않았을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했다.‘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기나 전서 제5장 16∼18절). 신앙인으로서 한목사의 삶은 그가 평생 애송하며 나침반으로 삼았던 성경구절 그대로였다.

▼각계인사들 조문 故人 청빈뜻 기려▼

한국기독교 원로인 한경직목사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중구 저동 영락교회에는 19일 밤 각계인사들의 조문 발길이 이어졌다. 영락교회 신도들은 원로목사를 잃은 충격 속에서도 비교적 차분한 모습으로 고인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고인의 뜻에 따라 검소하게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빈소가 마련된 영락교회 선교관에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종성 한국기독교학술원장, 어윤배 숭실대총장 등 기독교계 인사 들이 줄줄이 조문. 권영해 전안전기획부장도 모습을 나타냈다. 빈소에는 또 타 교회와 교단 인사들의 조문이 쇄도, 고인의 그늘을 실감하게 했다. 이들은 “특정 교회와 교파를 떠나 모든 기독교인들의 어른이셨던 한목사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 찾아왔다”며 교계의 ‘큰 별’을 잃은 아쉬움을 토로. 영락교회측은 “국내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조문단이 올 것으로 알고 있다”고 언급.

○…이날 오후 예배 때 이철신담임목사로부터 한목사의 별세 소식을 전해들은 영락교회 신도들은 비교적 차분한 모습. 영락교회측은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하셨고 많은 교인들이 한목사의 사망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큰 충격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목사는 이날 오후 예배에서 “일제시대 6·25전쟁 등 우리 민족이 고난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한목사님을 소중히 사용해 주셨다”며 “이제 부활절을 앞두고 고난 주간에 한목사가 돌아가신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영락교회측은 이날 저녁부터 각계로부터 조화가 답지하자 이를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나 김대중대통령이 보내온 조화는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정중히 접수. 영락교회측은 “평생을 소박, 청빈하게 사신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화환을 받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

○…영락교회의 장로들은 한목사의 일생을 회고하며 각자 기억하는 일화를 떠올리기도 했다. 김영배장로는 “평생 집 한 칸, 예금통장 하나 없이 사신 청빈한 분”이라며 한목사의 검약한 생활을 떠올렸다.

이모장로는 “30여년 전 연세대 재학 시절 한목사가 학교를 찾아와 강의를 한 적이 있다”며 “그분의 설교는 지식의 많고 적음을 떠나 누구에게나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나라사랑과 사람 사랑을 강조했다”고 회고.

<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