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0돌 특집/벤처21]노동시장 대변혁 회오리

  • 입력 2000년 3월 31일 21시 31분


끊임 없이 이어지는 벤처를 향한 엑서더스.’

공무원 기업 연구소 등 고급 인재들이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벤처기업으로 이동하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런 움직임은 한국에 자본주의가 도입된 이후 사실상 처음 벌어지는 일.

벤처기업은 풍부한 자본과 유연한 조직 문화를 기반으로 이들에게 자아성취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반대로 인력을 골라 쓰던 문화에 익숙한 대기업은 처음 맞이하는 엑서더스에 당황하다가 최근에는 이에 대응, 갖가지 인센티브 방안을 제공하고 있다. 벤처로의 엑서더스 현상은 한국의 노동시장 판도와 대기업 조직문화마저 바꾸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고급 공무원의 벤처행〓25년간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인터넷 광고회사인 ‘온 앤 오프(On & Off)’의 회장으로 변신한 구본룡(具本龍·50)전산업자원부국장.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구회장은 산업자원부 공보관 산업기술국장 무역조사실장을 거치며 ‘인터넷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던 엘리트 공무원 출신. 그는 “장관의 눈치나 보고 소신 없이 일하며 21세기를 맞을 수 없었다”며 도전(Challenge) 변화(Change) 기회(Chance) 등 3C의 정신을 창업에 적극 활용했다고 자부한다.

사표를 내기 두달 전인 지난해 10월부터 그는 벤처 1세대의 모임에 매일 참석하면서 인터넷 사업 모델을 개발한 뒤 창업을 굳혀갔다. 그는 “70년대 사무관 시절에는 사회 변동의 스피드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며 “모든 힘이 민간으로 옮아간 현실에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직에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구회장의 사직은 고급 공무원들의 본격적인 벤처행을 알리는 서곡으로 울렸다. 구회장이 창립한 회사에는 한국 최고 엘리트 조직을 자부하던 재정경제부 김석준(金錫俊·30)사무관이 팀장으로, 산자부 문선목(文善睦·37)서기관이 상무이사로 들어왔다.

이에 앞서 산자부 중소기업정책반장이던 이홍규(李弘圭)부이사관은 ㈜메디슨의 부사장으로 영입됐다. 올해에는 정보통신부 공종열(孔宗烈)국제협력관과 강문석(姜雯錫)지식정보과장 등 정보통신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아온 공무원들도 잇따라 벤처행을 선택했다.

▽대기업 엘리트의 벤처 러시〓대기업에서 일하던 인재들이 벤처기업으로 직행한 사례는 공무원보다 훨씬 일찍 나타났고 많다.

삼성SDS에서 바둑사업을 담당하다 이게임네트 기획 이사가 된 유승엽씨. 유니텔에서 일하던 98년 9월 그는 PC통신사업이 장기적으로 인터넷에 비해 전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회사를 그만뒀다. 사표를 던진 직접적 계기는 회사의 경직된 사고 및 보고 체계. 그는 “전망이 확실한 게임사업에 대한 품의서를 30번 이상 제출했으나 회사는 예산상의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고 말했다.

현대정보기술에서 15년 동안 근무하다 작년 3월 인터넷 솔루션 업체인 엘앤에스(L & S)정보기술을 창업한 신태호사장. 현대에서 솔루션 사업팀장을 맡고 있었던 그는 “우리가 소프트웨어 사업전망을 제시해도 경영진은 하드웨어 중심으로 사업을 이해했다”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는 괴리감이 창업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신사장과 같이 벤처기업 최고경영자가 된 대기업 출신들은 동료 직원들과 함께 사업에 뛰어들기 때문에 산업계 인력이동의 중심 역할을 하며 그 결과 벤처기업들 사이에도 출신회사에 따른 인맥이 형성되기도 한다.

▽엑서더스의 결과〓인재들의 이동에 따라 공직 사회와 대기업은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반면 벤처기업은 인력 구성의 고급화가 진행 중이다. 이런 이동은 기존의 직업관도 바꾸고 있다. 우수 인재들이 전통적인 엘리트 공무원 조직과 일류 대기업을 더 이상 선호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일부 대기업은 정보통신 업종 임직원의 4분의 1이 벤처기업 등으로 빠져 나가 전문직의 ‘공동화’를 맞고 있다. 현대정보기술은 인력 이탈이 심해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명예퇴직한 직원을 다시 고용하는 진통도 겪었다.

대기업은 전문인력 역류 현상을 방어하기 위해 과감한 인센티브제와 스톡옵션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벤처기업에는 경력과 능력을 갖춘 인재들의 입사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지난해 말 2명의 인터넷 기획자를 뽑은 네띠앙의 경우 지원자가 4453명이 몰려 75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전 직원이 일류대 출신으로 구성된 벤처기업이 늘어나고 고급 인력을 벤처기업에 소개하는 헤드헌팅 사업이 번창하는 것도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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