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되돌아 본 뉴욕100년]1960년대

  • 입력 2000년 3월 16일 19시 35분


1958년부터 10년 동안 세상은 안정적인 곳에서 불안정한 곳으로, 확실한 곳에서 불확실한 곳으로 변해갔다. 1958년은 앞으로 어떤 일이 다가올지 아무런 힌트도 보여주지 않았다. 1958년 백악관에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있었고, 바티칸에는 교황 파이우스 12세가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린든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학생들은 ‘피임약은 금물’이라고 쓰인 교황 바오로 6세의 포스터를 기숙사 벽에 붙여 놓았다.

1958년에는 추상적 표현주의자들이 미학의 세상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후 앤디 워홀은 추상적 표현주의를 케케묵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1950년대 말에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뮤지컬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지만, 1960년대 말의 인기 뮤지컬은 ‘헤어’였다.

정치적인 시위라는 측면으로 눈을 돌려보면, 뉴욕은 미국을 선도하기보다는 미국의 다른 지역에게 끌려 다니는 편이었다. 민권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곳은 남부였다. 뉴욕에서는 워싱턴이나 서부 해안 지방에 필적하는 반전시위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1960년대에 뉴욕은 놀이와 새로운 발명이 어우러진 곳이었으며, 전쟁에 근원을 둔 광기가 반영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1965년 이후에 반전시위가 일상생활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을 때, 우리 주위의 색깔은 점점 더 어둠침침하게 변해갔다. 1960년대를 어두운 색으로 바꿔놓은 것은 존 F. 케네디의 암살이 아니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1964년에 퀸즈에서 일어났다. 수천 명의 10대들이 비명을 지르며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비틀즈를 맞이한 것이 그 중 하나였다. 비틀즈는 젊은 세대와 윗세대의 간격을 보여주었다. 젊은이들은 마구 날뛰는 돌고래처럼 사회의 많은 공간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1966년과 67년은 특히 혼란스러웠다. 한편에는 베트남 전쟁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날뛰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마약, 섹스, 로큰롤이 가져온 축제 분위기가 세상을 휩쓸었다. 6년 전만 해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온 오드리 헵번의 흉내를 내며 5번 애비뉴를 걸었을 여성들이 이제는 포카혼타스 같은 모습으로 플라자 호텔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틴 루터 킹 2세와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뉴욕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관 중의 하나인 콜럼비아 대학을 뒤흔든 폭력 시위가 그것이었다.

1960년대 말에 바라본 1958년의 세계는 마치 멀고 먼 꿈나라 같았다. 1958년과 그 뒤를 이은 4년은 나중에 시작된 폭력적인 시대에 의해 불태워진 안개 같았다.

(http://www.nytimes.com/specials/nyc100/nyc100-7-gordon.html)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