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허리케인 카터/흑인복서의 좌절과 투쟁

  • 입력 2000년 3월 9일 19시 47분


피부색을 이유로 한 인종차별은 어쩌면 자연 재앙인 ‘허리케인’보다 더 거세고 무서울지 모른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덴젤 워싱턴 주연의 ‘허리케인 카터’는 한 인간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증오와 편견, 사랑과 신뢰 등 인간 감정의 격류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실제 백인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무려 22년간이나 감옥에서 지내야 했던 1960년대 흑인 복서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허리케인은 카터가 프로 권투선수로 활동할 당시 불여진 별명.

영화에는 감옥이 주요 무대의 하나로 등장하지만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처럼 교도소내의 인간 관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지는 않다. ‘밤의 열기 속으로’ ‘지붕위의 바이올린’ 등을 연출한 거장 노먼 주이슨 감독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다가온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자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의 좌절과 투쟁, 증오와 사랑의 이야기를 휴먼스토리로 만들어냈다.

흑백으로 처리된 권투 장면과 현재의 컬러 화면이 교차되는 영화의 도입부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흑백 간의 인종적 벽과 편견을 암시한다.

열 한 살 때 흑인 친구를 성추행하려는 백인 노인을 칼로 찔러 9년간 소년원에서 지낸 카터(덴젤 워싱턴 분). 그는 독학으로 권투를 배워 결혼도 하고 세계 타이틀에 도전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던 중 1966년 미국 뉴저지주의 작은 술집에서 백인 세 명이 피살당하는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공교롭게도 사건 직전 술집을 떠난 카터와 그의 팬은 어릴 때부터 카터를 증오한 백인 형사 델라 페스카(댄 헤다야)의 증거 조작으로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영화에는 카터 외의 다른 주인공이 등장한다. 25센트에 산 카터의 자서전을 읽고 감동한 뒤 그의 구명운동에 나서는 캐나다의 흑인 소년 레스라(비셀로스 레온 샤논).

레스라는 “증오가 나를 감옥에 가뒀지만, 사랑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카터의 말처럼 우정과 사랑의 힘을 상징하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레스라는 리사(데보라 카라 웅거) 등 환경단체 회원들과 함께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면서도 증거가 조작됐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골든글로브와 베를린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석권한 워싱턴말고 카터 역에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 이미 5년 전 카터 역을 자청했다는 그는 이 작품을 위해 27㎏이나 감량하면서 92년 ‘말콤 X’이후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살인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잦은 시점 이동으로 맥이 끊기는 게 영화의 흠. 또 레스라 일행으로 시점이 분산되는 바람에 카터의 내면 세계가 충분히 그려지지 않은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88년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카터는 현재 캐나다에서 억울하게 기소된 사람들을 돕는 재단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94년 WBC 세계 미들급 명예챔피언 벨트를 받아 명예가 회복되기도 했다. 12세 이상 관람가. 18일 개봉.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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