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정진홍/'눈물의 편지'…납골시설 절절한 사연들

  • 입력 2000년 2월 25일 19시 34분


우리의 삶은 숱한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만남은 하나의 점(點)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선(線)으로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끊어져 버린다. 우리 삶은 그런 점들과 끊어진 선들의 얽힘이다. 그리고 그 점과 선의 얽힘은 기억이라는 면(面)을 만든다. 그 기억의 면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 책은 그 ‘기억의 면’들로 채워져 있다.

벽제, 용미리 등에 위치한 서울시립 납골시설 다섯 곳에 ‘텅빈’ 노트들이 비치된 것은 작년 7월초였다. 그 노트의 겉면에는 ‘고인에게 쓰는 편지’라는 표제가 붙어 있었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해 만남의 선을 그리다 끊어져버린 숱한 사람들의 사연이 그 곳에서 모아져 기억의 면을 채워갔다. 지난해 추석 때까지 3개월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3500여통이 넘는 메아리 없는 편지들이 그 기억의 면 위에 촘촘히 채워졌다. 이 책은 그 중 193통의 편지들과 그것에 어울리는 같은 수의 그림들을 담고 있다.

아프리카 스와힐리족 사람들은 ‘사사(sasa)의 시간’과 ‘자마니(zamani)의 시간’을 산다고 한다. 사사의 시간이란 누군가와의 만남 그 자체의 시간이고, 자마니의 시간이란 그 만남에 대한 기억의 시간이다. 스와힐리족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군가가 죽어도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남아있는 한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 기억의 면들을 채우고 있는 고인(故人)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기억되는 한 여전히 살아있는 셈이다. 이 책의 저자 193명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죽은 자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휙 지나치듯 읽을 수 없다. 아니 그렇게는 읽히지 않는다.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기억으로 얽힌 갖가지 삶의 무게들이 읽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내림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활자들은 살아 있다. 개역성경에서나 봄직한 옛스런 활자들은 그 기억의 숨결들을 더 한껏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화가 이진경의 그림들은 그 기억의 숨결들을 때로는 무겁게, 또 때로는 천진난만하게 채색하며 스산한 기억의 면들에 온기와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 책은 결코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단지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진한 애정을 되돌려 준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그러나 가장 비범한 책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커뮤니케이션학) …3millenni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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