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공작원 납치실상 고백]마취제수건 덮어씌워 실신

  • 입력 2000년 2월 21일 19시 42분


전직 북한공작원 H씨는 지난해말 중국 지린(吉林)성의 한 호텔에서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사업가 C씨와 L씨에게 중국에서 활동중인 북한 공작원들의 규모와 납치실상에 대해 2시간에 걸쳐 상세히 설명했다. H씨는 또 자신이 직접 벌였던 납치공작의 전모와 피랍자들이 북한에서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털어놓았다.

H씨는 ‘한국행’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실상을 폭로했지만 남북관계 등을 고려해야 하는 우리 정부의 미묘한 입장 때문에 H씨의 ‘한국행’이 성사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납치수법과 규모▼

H씨가 털어놓은 북한 공작원들의 납치수법은 치밀하고도 조직적이다. 납치 대상은 기본적으로 탈북자. 그러나 그에 앞서 우선대상 1호는 배신한 공작원들이다. 다음은 반북(反北)활동을 하는 탈북자 조직원들이나 이들과 연계된 조선족들. 옌볜(延邊)의 비밀결사단체 ‘김정일처단위원회’나 ‘진달래망’, 산둥(山東)성의 ‘피해자의 목소리’ 등의 조직원이 바로 이들이 노리는 대상.

모든 납치공작은 ‘잠입조’와 ‘납치조’, ‘회수조’가 각각 역할을 분담한다. 중국 공안당국의 감시망을 피하고 납치공작이 탄로났을 때도 북한이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다.

현재 중국 지린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 등 조선족이 모여사는 동북 3성에 나와 있는 공작원 수는 H씨의 증언에 따르면 탈북자의 3분의 1선. 탈북자가 5만∼10만명 선으로 추산되는 점으로 미뤄볼 때 적어도 이 가운데 2만명 가량이 공작원이란 계산이 나온다.

▼견장등 구입 공안원 위장▼

이들은 탈북자로 가장해 활동하면서 납치대상자를 선정한다. 이들이 선정한 대상자를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나 조선인민군보위사령부 등에 보고하면 비준과 동시에 납치지시가 떨어진다.

납치공작 1건당 투입되는 인원은 조선족 협조자를 비롯해 5∼10명선. 납치 땐 주로 마취제가 묻은 수건을 얼굴에 덮어씌워 실신시킨 뒤 차량편으로 국경지역까지 옮긴다. 납치는 ‘상품을 따간다’는 은어로 표현된다.

탈북자를 납치할 땐 중국 공안복장(경복)과 견장, 족쇄 등을 구입해 중국 공안원으로 가장한다. 중국 영토 내의 탈북자 납치는 당연히 ‘불법’이지만 설령 중국 공안원들에게 적발돼도 돈만 주면 쉽게 풀려나온다는 게 H씨의 설명.

3, 4명씩으로 구성된 공작조의 임무기간은 보통 3, 4개월. 임무를 완수하면 공작원은 귀환해 보고서를 써낸 뒤 일정기간 ‘사상검토’를 거친다. 동북 3성엔 한국인 사업가도 많은데다 공작기간 동안 ‘자본주의의 물’이 들었는지의 여부를 점검하려는 의도에서다. 공작원 신분증을 각 조장이 회수해 보관하고 조원들끼리 24시간 상호감시한다.

H씨는 북한이 이들의 공작금 마련을 위해 고가의 각종 골동품을 밀반출해 중국에서 처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H씨의 납치행적▼

H씨가 최근 3년간 동북 3성에서 납치한 인원은 20여명. 대개 탈북자 가족이거나 탈북자 조직과 연계된 조선족들이다. 이 가운데엔 60년대 ‘지상낙원’의 꿈을 안고 북한으로 갔다 탈북했던 일본여인도 끼여 있어 눈길을 끈다.

▽최충성 일가 납치〓H씨는 지난해 3월 지린성 안투(安圖)현에서 한국의 친척과 연계해 탈북한 뒤 한국으로 가려던 최충성 임인숙 전선희씨 등 일가족 6명을 납치해 북한에 넘겼다. 납치한 일가족 중에는 다섯살짜리 어린이도 있었으며 이들은 현재 탈북자의 처벌수위를 결정하는 국가안전보위부 집결소에서 예심을 거쳐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다고 H씨는 전했다.

▽양초옥 일가 납치〓H씨는 이에 앞서 지난해 2월 남편 따라 북한에 간 일본인 처 양초옥씨(58) 등 일가족 4명이 북한을 탈출, 일본친척과 연계해 국외로 탈출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상부 지시로 이들이 은신 중이던 헤이룽장성 닝안(寧安)시의 한 조선족 마을에서 이들을 납치해 북한으로 넘겼다.

양씨는 30여년 전 북송선을 타고 한국인 남편을 따라 입북했던 일본인 처로 수년 전 식량난으로 남편이 숨지자 아들 딸 며느리 손녀를 데리고 탈출하려다 붙잡힌 것으로 알려졌다. 양씨는 함경북도 하성군의 한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됐다.

H씨는 “양씨가 북한에 귀화한 일본인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폭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상부에서 납치지시가 떨어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조원철 납치〓탈북자 조직과 연계된 조선족 조원철 납치사건은 중국당국이 북한에 의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직 물증을 잡지 못한 미제사건. H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지난해 4월 투먼(圖門)에서 조씨를 납치하는데 직접 관여했다고 털어놓았다. 북한당국의 부인으로 ‘의혹’으로만 남아있던 조씨 납치사건의 실상이 처음 확인된 셈이다.

H씨는 “조씨 납치에는 단순 탈북자 납치 때와 달리 수십여명의 공작원이 한꺼번에 투입됐다”며 “당시 조씨의 실종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중국당국이 북측에 강력히 항의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윤상호기자>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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