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정국/韓日 영화로 마음열기

  • 입력 2000년 2월 17일 19시 40분


올 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것 같다. 근래 개봉돼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일본 영화들의 스크린도 눈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관을 나서면 스크린을 하얗게 뒤덮었던 눈이 발밑에 밟히는 것 같다.

영화 ‘러브레터’에서는 잃어버린 첫사랑에 대한 젊은 여인의 안타까움이 눈이 되어 내리고, ‘철도원’에서는 소중하기 그지없는 딸과 아내를 잃고서도 시골 기차역에서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철도원의 회한이 눈이 되어 설원에 흩날린다.

정부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를 처음 취했을 때(1998년 10월) 들어온 영화 ‘하나비’ ‘카게무샤’ ‘우나기’는 우리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는지 흥행성적이 저조했다. 그러나 2차 개방(1999년 9월) 이후 들어온 ‘러브레터’(지난해 11월 개봉)와 ‘철도원’(2월초 개봉)은 상황이 다르다. ‘러브레터’에는 감수성 예민한 10, 20대를 중심으로 120만명의 관객이 몰렸다. 이에 반해 ‘철도원’은 평생 한 직장에 매달리며 그리움과 슬픔을 안으로만 삭이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화상을 찾으려는 40, 50대 중장년층이 몰려 현재 30만명을 넘어서며 롱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철도원’은 일본에서 지난해 450만명의 최다 관객을 모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만 일방적으로 일본 영화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사상 최다인 480만명의 관객을 모았던 ‘쉬리’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달 22일 개봉된 ‘쉬리’는 현재까지 80여만명을 끌어 모으며 관객몰이에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국에 대해 관심조차 없던 일본 젊은이들도 ‘쉬리’를 보며 한국인과 한국현실을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민은 이렇게 지난해 상대국에서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둔 영화를 거의 동시에 바꿔보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드문 일이고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한일관계가 독도 문제와 어업협정 문제 등 정치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불안정한 한랭기류에 휩싸여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서로 상대 국민의 ‘정서적 결집체’에 공감하며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앞두고 많은 사람이 염려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과정만을 놓고 본다면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개방은 양국민의 정서와 감성 교류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양국민간 정서적 공감대는 나아가 다른 분야에서 터져나오는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면서 화해와 협력을 싹틔우는 역할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굳이 2002년 월드컵 공동주최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한일 양국민의 이해와 협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 참에 양국은 ‘쉬리’의 한석규와 ‘철도원’의 다카쿠라 겐 등 국민적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는 흥행성 높은 영화를 공동 제작해 양국에서 동시 상영한 뒤 세계 시장에도 내놓는, 한 단계 진전된 대중문화 교류를 시도해볼 수는 없을까.

윤정국 <문화부 차장> jk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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