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김용숙/건전한 기부금문화 아쉬워

  • 입력 2000년 1월 25일 18시 30분


지난해 나는 일 하나를 확실하게 저질렀다. 평소 생각했던 것을 두서없이 적어둔 것이 한 권의 책이 됐고 그것이 수차례 인터뷰로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인터뷰에서 아줌마 반란부대를 만들고 싶다”고 불쑥 말했더니 시민단체 결성이란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았다.

늘 꿈꿨던 일이지만 막상 시민단체의 장(長)이 되자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많이 생겼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 동네 길목에서 예사로 하던 무단횡단도 맘놓고 못하게 됐다. 시장에서 과일 하나라도 허투루 사면 손가락질을 받을 것 같고 공중목욕탕에서 물 한 줄기라도 함부로 쓰면 당장 질책이 떨어질 것 같아 조마조마해졌다. 나의 주장과 나의 행동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매사에 올가미가 씌워진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나를 더욱 긴장시킨 것은 전국 아줌마들로부터 받은 열렬한 성원이었다. 미국 일본에서까지 전화가 걸려오는 통에 나중엔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식은 땀이 났다. 그래도 마음은 기뻤다. 그들이 전화를 걸어온 이유는 단 한 가지, 내 생각에 공감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평범한 주부도 시민운동이 가능한가 초등학교 밖에 안나온 사람도 회원으로 받아주느냐 …. 한 남편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서울 아내를 지방으로 데려왔는데 친구가 없어 우울해하고 자꾸 먹기만 한다는 것이었다.‘지방에서 어떻게 참여해야 하느냐’는 숙제를 받아들고 미처 지방 프로그램을 준비해놓고 못했던 나는 회원들과 며칠을 끙끙거려야 했다.

그래도 이런 고민은 쉬운 것에 속한다. 가장 큰 고민은 ‘돈’이었다. 막상 단체를 만들고 보니 모여야 할 공간과 상담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다. 처음 의도는 게릴라식 시민단체로 사무실을 두기 보다는 사안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만나고 모든 연락과 토론은 인터넷에서 하자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생각하다보니 홈페이지를 만들 필요를 느꼈지만 돈이 없었다. 내 한숨의 시작과 종점은 돈이었다.

여기 저기 고민을 털어놓고 다니자 고맙게도 몇몇 기업에서 후원을 제의했다. 문제가 생겼다. 소위 시민단체가 기업에서 주는 돈을 덥석덥석 받아도 되느냐 하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여러 지식인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그때마다 대답이 달랐다. 어떤 분들은 기업의 돈이라도 투명하게 쓰고 그 기업으로부터 떳떳하게 독립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또 어떤 분들은 돈을 받다보면 아무래도 그 기업을 비판할 수 없게 되고 이용당할 수도 있다며 반대했다.

어차피 좋은 일에 쓰는 거 눈 딱 감고 받을까. 좋은 일이라도 누구로부터 받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작은 머리로는 판단이 서지 않아 갈팡질팡했다.

남에게서 아무 것도 받지 않고 돈 한푼 없이 머리와 몸으로만 시민운동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못한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운동의 한계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의 후원금과 기부금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얼마전 빌 게이츠가 자선사업에 170억달러를 기부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고 신이 나 이것 봐. 빌 게이츠 돈도 받아쓰는데 우리라고 못 받을 게 뭐 있느냐”고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분에게 물어봤다. 그 분은 그건 얘기가 다르다며 정색을 했다. 빌 게이츠가 준 돈은 마이크로소프트(MS)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그가 세운 자선재단의 돈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돈을 받아쓴다고 해도 전혀 종속되지 않고 그 기업을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도 기부금 문화, 후원금 문화를 바꿔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시민단체에 필요한 가이드 라인도 마련됐으면 한다. 마음 같아선 경우에 따라 돈의 색깔이 변해 손을 대는 순간 받아도 되는 돈은 파래지고 받아선 안되는 돈은 빨개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모든 일이 너무 쉬워질텐데….

김용숙(아줌마는 나라의 기둥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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