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재벌, 언제까지 이럴건가

  • 입력 2000년 1월 24일 19시 10분


국내굴지의 재벌그룹들이 지난해 유치했다고 발표한 외자 중 10억달러 이상이 실제로는 국내에서 조달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재벌들은 기업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외자유치 명목으로 해외증권을 발행한 뒤 이중 일부를 국내에 들여와 편법 판매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막대한 차익을 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나 상속수단으로 악용했음이 드러났다.

국민경제야 어떻게 되든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재벌행태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사익(私益)의 극대화와 정당한 세금 없는 상속수단으로 해외채권의 국내판매라는 편법까지 동원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개인투자자들에게 그에 상응한 피해를 주었다면 더욱 용납할 수 없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외환보유고가 적정수준에 미치지 못해 외자조달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던 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재벌들은 외화표시 해외증권을 발행해 외자를 유치했다고 거짓 선전하고 뒷구멍으로는 외국인과 짜고 이들 주식연계 채권을 싼값에 매입한 뒤 비싼 값에 국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 과정에서 국내기업의 해외 현지법인이 외국인투자자로 위장하거나 역외펀드를 이용해 원금을 거의 들이지 않고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보유하는 편법을 동원했다.

해외증권을 신고 없이 국내에서 판매한 것은 명백한 위법행위다. 증권거래법을 어긴 해외증권 발행기업 및 주간사 업무를 맡은 증권사에 과징금을 물려야 함은 물론 편법 상속에 대한 탈루세액을 엄정하게 추징해야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같은 사실을 지금까지 방치한 금융당국도 문제다. 뒤늦게 과징금 부과 운운하지만 해외에서 발행한 채권이 국내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었는데도 이를 몰랐다면 직무유기를 한 셈이다. 아무리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이 발등의 불이었다 하더라도 편법이나 위법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또 기업들이 한꺼번에 해외증권과 주식예탁증서(DR)발행에 나서게 한 것도 잘못이었다. 편법에 의한 자금조달은 기업의 투명성과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려 중장기적으로는 외자도입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기업에 대한 비판이 여전하다. 지금까지의 재벌개혁이 ‘무늬만의 개혁’에 그쳤을 뿐 새로운 세계경제환경에 맞는 투명성과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의 문제는 아직도 멀었다는 지적이다. 그 와중에서 대기업의 주가조작과 부당내부거래 등의 추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주가조작이나 내부자거래는 궁극적으로 주식투자기반의 약화를 가져와 국내자본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한다. 재벌 스스로도 과거의 잘못된 경영행태와 관행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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