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31)

  • 입력 2000년 1월 23일 19시 12분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 방안의 슬픔에 함께 동참할 수는 없었어요. 이희수는 이미 지나간 날처럼 사라졌어요. 서로 떨어져 앉은 그네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오기 전에 내가 누이에게 말했어요.

저걸 내가 가져가두 될까요?

그네는 내 손가락 끝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습니다. 창턱에 놓여 있는 불상을 보았는지 아니면 그 옆에 있던 독일어판 티벳 경전이었는지 그네는 알아볼 겨를이 없었겠지만 얼른 고개를 끄덕여 주었어요.

물론이죠, 그러세요.

나는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손바닥만한 동불상을 향하여 똑바로 걸어가 손에 쥐고는 돌아서서 나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내 방 소파에 주저앉자마자 나는 큰소리로 마음껏 울어대기 시작했어요. 마리는 그날 밤에 그걸 들었대요. 그런데도 꼼짝도 않고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지요. 서양 사람들 타인의 감정에 개입하는 일엔 원래 소심하잖아요. 그리고 독한 깍쟁이들이고. 이튿날 오후에 시간을 알고 있어서 테겔 공항에 나갔어요. 두 여자는 마치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출구 앞의 대기실에 각자 떨어져 앉아 있더군요. 나는 먼저 누이에게 가서 옆자리에 앉았어요. 그네는 어제와는 달리 화장도 했고 옷도 갈아입고 있어서 다른 여자 같았죠.

짐 정리를 했어요. 연구소 측에서 나중에 부쳐 준다구 하더군요.

나는 가구마다 흰 시트를 씌운 그의 텅빈 방이 떠올랐지요. 그네가 물었어요.

오빠하구 결혼할 거였어요?

나는 솔직히 그와 베를린에서 만난 그 상태대로 만족했고 앞으로 긴 세월동안 어떻게 살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솔직하게 대답하지는 않았답니다. 다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이 귀국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우리 오빤 정말 복두 없어.

하면서 그네는 얌전히 핸드백을 열고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찍어 냈지요. 그네들이 출구로 나갈 때에 이제껏 한마디도 하지않던 이 선생의 어머니가 나가려다가 나를 한번 돌아보더니 몇걸음 쫓아나와서 말하더군요.

자식을 대신해서 사과하는데…미안해요. 잘 살아요.

25

다시 한 해가 갔어요. 구십일 년 팔 월에 소련은 쿠데타를 시작으로 완전히 해체 되어 국가사회주의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전 세계에 보여 주었지요. 이희수씨의 죽음은 의외에도 작은 사건처럼 곧 지나가 버리고 말데요. 그이와의 시간이 덧없게 느껴졌다기 보다는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 되었어요. 바로 최근의 일이 아니라, 아득한 유년시절에 어느 강뚝에서 자운영을 따고 팔찌를 엮고는 입술에 강아지 풀을 깨물며 누웠던 봄날이 뇌리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어느 부분은 명료하고 어떤 일은 아무리 애써도 희미하기만 해요. 오히려 사소한 것들이 오래 남아 있는 셈이었어요. 그래요 이제는 모두 사소한 것들 투성이죠. 그의 방에서 가져온 손바닥만한 불상이 내 책상 위에 같은 모습으로 서있었습니다. 나는 당신과 그가 지녔던 어떤 편향을 오가면서 차츰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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