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Fashion]옷을 보면 '당신의 속'도 보인다?

  • 입력 1999년 11월 16일 18시 43분


《“옷의 아주 자그마한 부분 하나만으로도 한 사람의 성격 전체를 나타낼 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식의 화려함은 필요없다. 옷의 장식이 러플밖에 없다면, 그 옷을 입고 있는 여성이 어떤 사람인지 즉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패션은 집단적인 갈망을 나타낸다. 캘빈 클라인 같은 디자이너는 우리의 삶에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좌절감을 느끼고 우리에게 미니멀리즘을 선사한다. 톰 포드 같은 디자이너는 억압된 성을 느끼고 우리에게 야한 옷을 제공한다.

▼ 자신이 원하는 모습 담겨 ▼

그러나 옷은 패션 경향과 다르다. 충동구매에 의해서건, 선물을 받은 것이건 간에 우리 손에 들어와서 옷장에까지 걸리게 된 옷들은 바로 우리 자신을 나타낸다. 우리가 매일 용감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걸치는 옷들은 유행이나 의류 회사의 마케팅 기법과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걸치는 옷들은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우리 자신의 모습, 혹은 우리가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어쩌면 패션업계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유행의 노예가 아닌지도 모른다. 오히려 유행이 사람들의 노예인 것 같다. 사람들은 패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샀던 옷들이 옷장에 걸려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과거의 자신을 돌이켜볼 수 있다. 옷장은자신의 삶을 나타내는 일종의 자서전과 같다. 그러나 단 한 벌의옷이나 단 하나의 장식품만으로는 자신의 자아를 완벽하게 드러낼 수 없다.

용기를 얻기 위한 옷들을 갖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펑크 스타일이나 힙합 스타일, 혹은 찢어진 청바지처럼 나이든 사람들이 입기에는 너무 젊어 보이는 옷들이 그런 종류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한 옷도 있다. 권위를 풍기는 단정한 정장이 그런 종류다. 어떤 사람의 옷장에는 남자친구를 위한 옷도 있다. 짧은 치마와 몸에 꼭 달라붙는 스웨터 등은 남자친구를 위한 옷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도 있다.

옷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연기하고 있는 역할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우리가 입은 옷은 대부분이 그 옷을 입은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줄 것인지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정 자기 자신만을 위해 옷을 고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으로 떠나는 휴가 여행이나 어린 시절처럼 머리를 늘어뜨릴 수 있는 파티같은 것들에 우리는 항상 깊은 애착을 느낀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서 남이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정체성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보그지에 실릴 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그 잡지의 편집자는 필자에게 밝은 빨간색 모직 정장을 입혀주었다. 그런데 필자의 어머니는 그 잡지를 다섯 번이나 훑어보았는데도 한 페이지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필자의 사진을 찾아내지 못했다.

▼ 야심등 복잡한 심성도 표현 ▼

우리가 고르는 옷들은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의 얼굴이나 몸보다도 훨씬 잘 드러내준다. 옷은 또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육체적 결점을 바로잡을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옷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감춰주기도 하고, 그 사람의 야심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옷이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자신만큼이나 복잡하다.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home/19991114mag―identit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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