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왕석구/'남성 1호'의 자부심

  • 입력 1999년 10월 28일 20시 11분


“준비 다 됐지?”

“화장 안왔는데요.”

“뭐? 전화 다시 해봐!”

“벌써 떠났답니다.”

“근데 왜 안와? 모델이 오후에는 다른 촬영 가야 된다고.”

화장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내 이야기를 하는구나. 나는 한참 전에 도착했는데 무조건 저 쪽에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처음엔 늘 이런 식이었다. 넘어야 할 벽, 깨뜨려야 할 틀이 너무도 많았다.

메이크업하러 왔다고 하면 의아하게 쳐다보던 시선에 먼저 익숙해져야 했다. 모델의 굳은 얼굴은 유머로 풀어야 했다. 대리석을 깎은 듯 예쁜 여자들의 얼굴을 만지는 손의 떨림부터 다독여야 했다. 어디 쉬운 일이 있을까마는 남자가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길을 개척하다 보니 한동안 사람들의 야릇한 시선이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메이크업의 패턴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썹 그리는 법, 파운데이션 사용법 등 정해진 메이크업 순서를 어기면 큰일이 나는 줄로 알았다.

메이크업도 창조 작업이다. 모델의 얼굴에 맞게, 광고의 컨셉트에 따라, 행사의 성격을 고려해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메이크업을 추구하다가 당시 국내 최초로 보디 메이크업에 도전했다. 요즘에는 더한 일도 하지만 수영복을 입은 모델의 몸을 캔버스 삼아 작품을 만드는 것이 당시로서는 힘든 도전이었다. 별 소리를 다 들었지만 그래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많아 큰 힘이 됐다.

처음부터 ㈜‘태평양’이라는 큰 물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메이크업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혼도 나긴 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드디어 ㈜태평양의 간판모델이던 당시 톱탤런트의 메이크업을 맡게 되었다. 정말 떨렸다

톱스타는 마음도 톱이었다. 오히려 한없이 떨리는 나를 편안하게 해주려 애쓰는 것이었다. 덕분에 작업은 매우 순조롭게 끝났고 이후 다른 작업을 할 때도 내 페이스대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심지어는 결혼식 때 나의 신부까지도 내 손으로 메이크업을 했다. 한참 메이크업에 눈을 뜰 때였는데 신부라고 나타난 모습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광고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처절할 정도로 치열한 준비가 필요하다. 새로운 배경을 찾아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험한 곳을 찾을 때가 많은데 남자라는 이유로 오지 촬영에 따라가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덕분에 오지란 오지는 거의 다 다녀봤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 1호로 불리고 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내가 끝까지 남아 듣게 된 영광스러운 칭호이다. 그저 메이크업이 좋아서 줄곧 해오다보니 벌써 17년. 요즘에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지망하는 신세대 남성들이 많아 세상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한국의 미용 역사는 길다. 단군 신화에서 쑥과 마늘을 들고 동굴로 들어간 것이 바로 미백화장의 효시이다. 고구려 신라시대의 그림을 보면 남자들도 화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가 길면 그만큼 오늘날 되살릴 소재도 많다는 뜻이다. 우리의 역사, 특히 생활문화를 되짚어 보면 심금을 울리는 색깔들이 수도 없이 많다. 실제로 사찰의 단청 색깔이 메이크업 캠페인을 통해 많은 여성들의 입술에서 피어난 적도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옛날과 오늘을 이어가고 싶다.

왕석구<메이크업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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